비겁함과 다정함 사이
지하철이 마지막 역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릴 차비를 하던 내 눈에 걸린 건 건너편에 앉아 졸고 있던 아주머니였다. 이내 종점에 도착했다는 지하철 방송이 나오는데도 어찌나 단잠에 빠지셨는지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어째야 하나 고민이 됐다. 주위를 둘러보니 저 멀리 젊은이 두엇이 있고, 그들도 슬쩍 아주머니를 돌아보았다.
아주머니를 깨워줘야 할 것 같으면서도 굳이 내가 나서서 튀는 행동을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결국 알아서 깨지 않겠는가... 가만히만 있어도 중간은 간다던데...
얼마 전 친정에 갔을 때였다. 그때 우리는 코다리 냉면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고 차 안엔 친언니 내외와 부모님도 타고 있었다. 들어선 길을 조금만 내려가면 음식점에 도착할 참이었다. 본래 2차선인 길은 양쪽의 불법 주차 차량들 때문에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좁았다.
일은 반대편에서 차량이 오면서 일어났다. 처음엔 형부가 양보했다. 오면서 상대 차가 비켜줄 만한 틈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엉거주춤 가던 우리 차가 그곳에 도착했고 상대차가 그 자리로 들어가길 기다리는데, 어째 그는 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비켜줄 마음이 전혀 없었고 두 차의 버티기가 시작됐다.
잠시 후 반대편 차의 운전자가 문을 열고 다가왔다. 전혀 고맙지 않은 얼굴로 지금껏 양보해 준 건 감사한데 하는 김에 끝까지 비켜달란다. 엄연히 부탁이 아닌 요구였다. 한동안 실랑이가 오가는 이 상황이 너무나 불편한 나는 마음마저 딱딱히 굳어 금방이라도 바삭 부서질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 그 차 뒤로 차가 여러 대 붙어 결국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끝까지 후진을 해야 했다. 음식점에 앉아서도 그 상대 운전자의 적반하장적 태도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가 다음에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꼭 완전 무서운 조폭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얄궂은 저주를 했다. 정작 그가 형부와 실랑이를 할 땐 말 한마디 못 했으면서...
나는 스스로를 정의할 때 '비겁함'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용기의 가치를 더욱 크게 두고 많은 일 앞에서 용기를 내려고 노력한다. 평소의 나는 좋은 게 좋은 거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차라리 내가 손해 좀 보고 말지 이런 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엄한 아버지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충청도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저 타고나길 회피 성향이 강해서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쨌든 나는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 대해 뒤에서 구시렁거리기나 한다.
처음엔 그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인간의 도리라며 내 몫은 무조건 해내려 애쓰고 살았다. 그러나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하고 뭔가를 참고 주저하는 내 비겁함은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역 앞에서 길을 묻는 아저씨를 만났다. 그분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은 왜 기차를 타고 왔나 싶게 먼 거리였고, 버스를 한 번 갈아타야 하는데 그 정류장 위치마저 초행길엔 헷갈릴 위치에 있었다. 나는 목소리를 높이고 침을 튀겨가며 버스 정류장의 위치를 설명했다.
그렇게 동행 아닌 동행이 시작되었다. 우리 사이엔 4차선 도로가 있었고 혹시 아저씨가 엉뚱한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까 줄곧 주시하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이 하나 나오자 건너편의 아저씨도 눈빛으로 이곳이 맞는지 묻고 있었다.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면 더 가야 한다고 손짓했고 아저씨는 계속 내 눈치를 보며 정확한 정류장을 향해 나아갔다.
이런 행동에 다른 사람에게 잘 보고 싶은 마음만 있을 리가! 소설 <경우 없는 세계> 속 가출청소년 경우는 그들이 머무는 집 아닌 집에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쓰레기를 치우고, 다친 친구를 위해 기꺼이 모아둔 돈을 치료비로 내놓는다. 이해를 따지지 않는 그 마음과 행동에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겠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혹시 그 아저씨가 엉뚱한 버스 정류장에서 시간을 버릴까 봐 끝까지 따라붙던 나의 눈길, 음식쓰레기통에 든 비닐봉지를 주워내는 내 손길, 노포들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에 일부러 찾아가는 발길이 그렇게 단순한 마음일리 없다. 차라리 그건 나를 이루는 어떤 본질 같은 게 아닐까? 그저 타인에게 다정한 내가 좋고, 내가 되고 싶은 어떤 사람에 어울릴만한 행동 말이다.
그래서 나는 혹시라도 잠에 빠져든 아주머니가 놀랄까 그녀의 팔에 은근한 손끝을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르신, 종점 도착했어요."
그녀의 팔을 제대로 쥐지도 못한, 더없이 담백한 그 손끝에 나의 온기가 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