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댓글을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건 뭐지?’였고, 그다음엔 화가 났다. 평범한 일상을 담은 포스트 속, 내 아이가 잘 먹어 뿌듯했다는 글에 달린 이웃의 댓글 때문이었다.
"헙 OO이가 잘 안 먹나봐요ㅜㅜ 울 애들은 식성이 좋아서 정말 잘 먹어요. 그래서 단점은 식비가 많이 들어요 ㅋ"
아이가 잘 먹는다는 말에 굳이 자기 아이 자랑을 덧붙이고, 내 아이를 입 짧은 아이로 만들어버린 그 말. 맥락 없는 자기 자랑, 은근한 우위의 말투, 뒷전으로 밀린 내 감정으로 불쾌했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 A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관심사가 같다고 생각해 만났는데 대화가 뚝뚝 끊겼다. 내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가 곧 자기 경험을 얹으며 대화의 방향을 바꿔버리는 사람. 처음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이후 오래 알아온 지인 B에게서도 같은 태도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번엔 블로그 이웃 C까지. 반복되다 보니 이건 한 사람의 특성이라기보다 일종의 ‘패턴’처럼 보였다.
이런 사람들과의 대화는 공이 오가는 핑퐁이 아니라, 자기 몫의 대사만 중요한 독백이나 마찬가지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금세 대화를 끊고 자신의 경험을 얹으며 은근슬쩍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가 버린다. 그 말을 하려고 내내 끼어들 틈만 살피고 있던 사람들처럼, 나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청중인 것처럼.
며칠 후 C는 블로그에 단톡방을 나간 사람들을 향한 저격성 글을 올렸다. 인사도 없이 나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며, 인성교육까지 언급했다. 그가 나를 감안하고 그 글을 올렸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 역시 인사 없이 방을 나왔기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카운터 펀치를 날렸어야 했나? 농담처럼 여유롭게 한 마디 얹었어야 했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평소 블로그에 많은 게시물을 올린다. 나로선 굳이 이런 것까지? 싶은 게시물이 계속해서 올라왔고, 나와 좋아하는 분야가 겹치는데도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선 너무 차이가 나서 점점 피로감이 쌓였다. 게다가 그 많은 글들 중에서 ‘그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내겐 계속해서 의문이었다. 신변을 솔직히 털어놓는 것과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건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은 내게 유난히 오래 남았다. 단순히 불쾌한 일을 겪었다기보다, 그 감정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자꾸 들여다보게 됐기 때문이다. 그 행동을 제대로 이해해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되지 않아, 소의 되새김처럼 반복해서 곱씹었다. 관계를 끊어버리는 쉬운 선택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괴로운 일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매번 회피를 선택해 왔기 때문에 이젠 그것을 직면해야 했다.
혹시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YES. 그렇다면 예민할 만한 사정이 있었던 걸까? 역시 YES. 나에겐 이미 어떤 ‘안경’이 씌워져 있었던 셈이다. 그건 ‘확신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얼마 전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D가 속상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해결책을 쏟아냈다. 안타까움의 표현일 수 있지만, 그 순간은 하나의 경연 같았다. 누가 더 좋은 해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를 겨루는 장. 그런데 해답이란 건 언제나 위계가 있다. 문제를 가진 사람과, 그걸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 사이에. 이게 누가 위에 설만한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D는 해결책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이해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저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강한 신념은 곧 확신이 되고, 확신은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대화는 점점 설득의 장이 되고, 결국 통제의 형태를 띠게 된다. 가스라이팅이 그렇고, 통제광(control freak)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자신의 생각을 바꿀 의사는 없고, 타인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려는 사람들.
그러면서 나는 문득 의아한 감정에 휩싸였다. C의 행동이 혹시 나를 질투해서였던 건 아닐까?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두 번 있었다. 나의 블로그엔 ‘본연의 내’가 있다는 어쭙잖은 우월감에서 기인한 것. 그런데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건 내 아버지의 사고방식이었다.
아버지는 인간관계가 늘 삐걱거렸다. 그리고 언제나 상대가 자신의 ‘비범함’을 질투해서 그렇다고 여겼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결국 불행을 맞는다고 종교에 가까운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불행이 끼쳐온다면 그건 자신에게 잘못된 것에 대한 당연한 대가였다. 그게 아버지의 낮은 자존감 때문인 걸 알면서도, 나 역시 같은 프레임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여전히 C가 밉다. 나아가 마음껏 욕하고 싶다. 이런 생때같은 미움은 어디서 오는가. 그 감정을 들여다보면 그것이 완전히 타인을 향한 감정만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내 안에 이미 그와 관련한 오래된 상처와 욕망이 있고 그 대화가 그것을 자극했기 때문이리라. 나답지 못할까 봐 두렵고 초조한 마음이 내 안에 있었던 거다. 이럴 때 대화는 거울이다. 타인을 미워하면서, 동시에 나의 못난 모습을 발견하는.
나는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해 왔다. 이해 대신 통제, 공감 대신 자랑, 맞장구 대신 해답에 기가 질렸다. 그런 확신을 지적하고 나를 조종하려는 듯한 태도에 기분 상하면서도 내 확신이 더 옳다고 이야기하고 그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데려오려 했다. 결국 나도 나도 누군가에게 옳음을 주장하고 누군가를 통제하려는 욕망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미움은 아프다. 그 화살이 결국 나를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하고 싶은 욕망은 강력하다. 그것은 대화, 블로그 글, 릴스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흘러나온다.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여러 욕망을 본다. 공감 대신 자랑을, 이해 대신 통제를, 맞장구 대신 해답을 내놓는 모습을. 날뛰는 욕망을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각자 혼잣말을 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정답을 모른다. 내가 느낀 감정이 분노인지, 실망인지, 씁쓸함인지. 아니면 그동안 쌓여온 방치된 말들에 대한 울분인지. 그런데도 대화의 본질이 위로여야 함은 점점 더 선명해진다. 타인의 말에 내 경험을 덧대는 것이 공감이 아니듯 타인의 괴로움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진짜 위로가 아니듯. 누군가를 이해하려 지금도 연습 중이란 사실이, 나는 역시 말을 잘하기보단 남의 말을 더 잘 듣는 사람이고 싶다는 확신이 내가 이 글을 쓰며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