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나
성가대가 노래한다. 가늘고 높게 뽑아내는 솔로 파트, 노래 꽁무니를 바짝 따라붙어 입체적으로 쌓여가는 화음. 그러나 내 눈은 노래하는 그들의 백발에 사로잡혀 있다.
성당에 가면 나는 가능한 앞 쪽에 앉는다. 내가 자주 앉는 자리에선 성가대 전체가 잘 보인다. 그곳에 젊은 사람을 보기는 어렵다. 신도석도 큰 차이가 없지만 성가대의 장년층은 유독 압도적이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들이 한 음 한 음 꾹꾹 눌러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면 나는 종종 안도감과 함께 울컥함마저 느낀다.
안도감은 내 선택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거였다. 저만큼 오래 산 사람들이 이 종교를 선택한 걸 보면 영 잘못된 선택은 아니구나 싶다. 그렇다면 이 울컥함은 뭐지?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진심을 본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여러 형태로 나를 찾아왔다. 우스운 분장을 하고 각설이 타령을 하는 이를 보면 그를 바라 볼 자식을 상상하고 울컥해진다. 어린 몸으로 오래 연습했음이 보이는 듯한 유아들의 재롱장치를 볼 때도 내 마음은 쉽게 흐므러진다.
신성한 감동 속에서 나는 낯익은 얼굴을 떠올린다. 늘 같은 자리에 있었기에 지나쳤던. 부재로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 그는 평소 약간의 예민미를 가진 장년이었다.
예민미는 일반적으로 까칠하다거나 유난스럽다는 식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띤다. 이런 게 좋을 리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에 대한 예민함을 추구한 걸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건 바로 윤리성이었다. 그건 단순히 선하다거나 도덕적인 것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뉴스를 볼 적마다 나는 한탄한다.
‘어찌 이리 세상에 후안무치( 厚顔無恥)한 인간들이 많은가?’
그들은 그저 국민이 아니라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도자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제 신념이나 철학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차라리 그들이 그 결정이 옳다고 믿는다면 더 나을 거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내 눈에 그들은 옳지 않은 걸 알면서도 이익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거로 보인다. 그들은 돈을 섬긴다.
평일 낮 시간에 커피숍에 갈 일이 종종 있다. 그 시간대에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들은 장년 여성들이고 언제부턴가 카페에 그 연령대 손님이 부쩍 늘었다. 나는 저 중에 과연 누가 저 나이에 도달한 나와 가장 비슷한 모습일까 눈가를 좁히며 가늠해 본다.
우선 나는 하얗게 샌 머리를 염색하고 싶지 않다. 무언가를 억지로 하기 보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클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을 하겠다보단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평소 할 수 있는 것보다 하지 못하는 비검함에 관해 반성을 많이 하는 편인데도 말이다.
사람이 나이가 든다고 자동으로 유해지는 건 아니리라.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본래 성향이 더 선명히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그런 변화가 단점에서 두드러진다면 비극이다. 눈앞의 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옳은 신념으로 이 삶을 완성하고 싶다.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부끄러움은 느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예민함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이 나보다 천천히 늙을 누군가에게 어떤 영감이나 바람을 갖게 한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