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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함의 온도

by 은섬


에어컨이 죽었다. 중복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거실에 있던, 한참 유행이 지난 핑크빛 에어컨 때문에 자꾸 차단기가 내려가더니 어느 순간 차단기가 아예 올라가지 않았다.

관리사무소에서는 직접 해줄 수 없으므로 전기업체를 부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언제 올 지는 장담할 수 없단다. 마침 주말까지 끼어 있었다. 최대한 빨리 조치가 취해질 수 있도록 애쓴다는 직원의 말에 위안받는 내가 싫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전기업체 직원이 왔다. 에어컨과 차단기를 여러 번 오간 직원의 판단은 에어컨의 문제란다.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제조년이 2005년이니 딱 20년을 썼다. 죽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수긍이 갔다.

A/S 직원이 빨리 올 수 있으리란 기대 없이 예약을 했는데, 웬걸? 1시간 후 방문을 온단다.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좀 더 살아준다면…


우리 부부는 특별세일을 한다는 전자제품 매장을 찾았다. 에어컨 제조업체 A/S 기사는 결국, 확인사살만 하고 갔다. 내년에 이사를 하고 싶은 우리는 이번 여름만 잘 버텨보자며 소형 에어컨을 구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매장에선 우리 평수에 벽걸이는 시원하지 않다면서 판매를 거부했다.

그렇다고 얻은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곳에서 알게 된 이동형 에어컨을 집에 돌아온 우리는 폭풍 검색했다. 최종안은 대기업 것보다 20~30만 원 저렴한 중소기업 제품. 저렴한 대신 창문 시공이 셀프였고, 남편이 설치한 것은 다섯 살 꼬마가 한 대 쳐도 쓰러질 것처럼 허술했다. 그래도 에어컨이라고 돌아가니 쩍쩍 달라붙던 발바닥이 약간 뽀송해졌다.

그러나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웠다. 처음엔 견딜만하다고 느꼈던 소음이 갈수록 견디기 어려운 수준의 소음으로 변했다. 누군가 귀 옆에 붙어 하루 종일 악다구니를 쓰는 기분이었다. 반품을 하고 새 제품이 오기까지 다시 4일이 걸렸다.

새 제품을 싣고 온 직원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설치를 하고 사라졌다. 소음이 기분상 이전 제품에 비해 절반이었다. 스탠드 에어컨만큼 시원하진 않았지만, 여름 한 철은 날만 했다. 우리 부부는 '이게 대기업 맛이구나!' 하며 기뻐했다.


기존의 에어컨이 고장 나고 새 에어컨이 들어올 때까지 딱 10일이 걸렸다. 처음 고장이 났을 때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 사람은 남편이었다. 나만 시원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닌데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는 우리 집에서 더위가 가장 많은 사람이 남편이라고 생각하기에 조금 이해가 됐다.

그 10일 동안 나는 틈만 나면 아파트 북카페로 갔다. 말하자면 에어컨이 틀어진 그곳으로 피서를 간 셈이다. 많게는 하루에 3번까지 북카페에 갔다. 그런데 나와 달리 이 씨 부녀는 북카페에 한 번도 가지 않고 선풍기만으로 더위를 버텼다.


뭐야? 내가 더위를 제일 못 견디는 것 같은데? 더위를 가장 많이 타는 게 나였나?


과거의 나는 더위를 아주 잘 견뎠다. 시골집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1대뿐이었다. 식구가 많았던 탓에 그것은 우리의 더위를 식히긴 역부족이었다. 언니와 나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10번씩 부채질을 해줬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옆에서 안 움직이면 안 덥다는 선사( 禪師) 같은 말을 하곤 했다.


더위를 견딘다는 건 단순히 땀을 닦아내고 짜증을 참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건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힘이 아닐까? 이 더위처럼 나의 내면엔 뜨거운 열기를 가진 불편함이 있다. 오래전부터 그것은 내게 견딤을 요구했다. 그건 바로 솔직함. 은연중 내가 자주 쓰는 말엔 ‘솔직히, 사실은, 진짜, 진실’ 같은 단어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첫 남자친구를 사귈 때도 최소한 내가 그에게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없을 때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지난해 도서관에서 수필 수업을 들을 때였다. 매달 선생님이 내어주는 주제에 맞춰 글을 썼는데, 그때 유독 나는 솔직한 글을 쓸 수 있었다. 내 삶에서 너무 중요한 일이었는데도 한 번도 글로 써보지 않은 일들이 차례로 글로 완성됐다.

아마도 그 일들로부터 아주 많이 멀어졌기 때문에 또 그간 나의 몸과 마음도 성장했기 때문에 그 일을 바라볼 용기가 생겼던 걸까? 때를 만나 과거의 고난들을 소화해 냈다. 인생의 한 마디가 완성된 느낌으로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부작용이 생겼다. 글을 쓰고 났을 때 느꼈던 개운함이 문제였다. 목에 걸렸던 무언가가 뱉어지는 듯한 감각이 개운하고 짜릿했다. 중독될 만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까발리고 싶었고, 그럴 때면 어떤 것도 빠짐없이 모두 적고 싶었다. 생략되는 게 있다는 게 못마땅했다.

어쩌면 내가 추구했던 솔직함은 그 어떤 것도 뒤에 남겨지지 않는 날 것 그 자체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말을 하지 않은 건 거짓말이 아닌데도 남자친구에게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글쓰기에서 솔직함은 능사가 아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욕망은 친절한 글을 넘어 TMI(Too Much Information : 너무 과한 정보)가 돼서 에어컨 없는 여름처럼 짜증스러울 수 있다. 스스로를 폭로하는 건 작가가 감당할 문제지만, 세밀화처럼 모든 것을 쓴 글을 독자에게 감당하라고 할 순 없다. 더 많은 독자가 공감하고 기뻐할 글을 위해 모두 말하고 싶은 마음의 열기를 견디고 적당한 생략과 절제를 선택하는 용기가 내겐 필요하다.


지난주 나는 오랜만에 혼자 당일치기 여행을 했다. 차를 가져가면 3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버스와 지하철, 동해선까지 환승하며 2시간 30분이 걸려 바다에 갔다. 하차했을 때, 에어컨 바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시원한 바람이 바다 쪽에서 불어왔다.

이날 내내 덥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참을만한다고 생각했다. 역시 나는 더위를 잘 견디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마음속 불편함도 이처럼 견뎌내는 힘으로 조금씩 자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이 더 좋은 글을 쓰도록 날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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