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창작과에서 여러 수업을 들었다. 그 중엔 정말 나랑 맞지 않는 수업도 있었다. 예를 들면 시와 작사 수업이 그랬다. 가장 진심이었던 건 당연하게도 소설 관련 수업이었다. 나는 소설을 쓰고 또 더 잘 쓰고 싶었으니까.
3학년 1학기에 들은 소설 수업, ‘나도 소설을 쓸 수 있다’ 과목은 소설의 입문 과정이었다. 김종광 작가가 교수님이시다. 이 수업에서 교수님이 강조한 게 있는데, 그게 사실성, 개연성, 진정성 그리고 핍진성이었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지만 그 작품에서 진실성을 느껴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핍진성이다. 아마 독자가 소설을 읽고 이거 작가가 경험한 일 아냐? 라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핍진성이다. 매번 교수님은 이걸 강조하셨다.
14주 수업 중 마지막 3주가 학생 작품 피드백에 할애되었다. 그때 나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중년 교수가 산에서 겪는 이야기를 썼다. 지인에게서 얻은 소재로 즐겁게 소설을 써냈고 혹시 교수님이 너무 잘 썼다고 공모전에 내보라고 하는 게 아닐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피드백을 기다렸다.
가차 없는 평가 앞에 내가 헛물을 제대로 켜고 있음을 깨달았다. 교수님은 어디서 본 것 같은 뻔한 이야기라며 핍진성 부족을 지적하셨다. 나는 완전히 시무룩해졌다. 머릿속에서 ‘핍진성’이 계속 맴돌았는데 그게 거의 고문을 받는 수준이었다.
이 뒤로 내 소설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 처음 소설을 쓸 때 내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로맨스였다. 많이 읽은 웹소설 영향이지 싶다. 그것들을 읽으며 가슴이 설렜던 경험이 소중해서 나도 그런 글을 싶었다. 내가 쓴 로맨스를 엮어 만든 이야기가 소설집 ‘너의 다정이 나를 살리고’ 이다.
책을 엮으면서 느낀 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쓸 사람은 널렸다. 심지어 나는 20대도 아니다. 그렇다면 40대의 내가 잘 쓸 수 있는 이야기는 뭘까? 남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건 어떤 이야기일까?
이때부터 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수업 중에 김종광 교수님도 이 점을 강조하셨다. 자신이 제일 잘 아는 이야기, 직접 경험한 이야기를 하라고. 그건 그 사람만 쓸 수 있는 거고 표절에서 자유로운, 핍진성이 살아있는 글이라고.
내 소설엔 특히 나이든 아버지가 많이 등장한다. 자전적 이야기는 일부지만, 어릴 때 경험한 에피소드들을 가져오니 당연하게도 쓰기 수월하고 내용도 현실적이었다. 글에서 안개가 걷히고 뭔가 꽉 찬 느낌이 드는 게 더 만족스러웠다.
이런 변화를 나는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 구름 위에 떠 있던 글쓰기가 이제야 땅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고. 지금도 글쓰기에서 뜬구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순 없다. 난 여전히 로맨스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처럼 내 삶이 녹아든 글을 열심히 쓰다 보면 언젠가 돌고 돌아 후에 훨씬 더 깊이 있는 로맨스 소설도 쓸 수 있을 것 같다.
편입해서 시작한 공부는 이렇게 나의 글쓰기를 극적이진 않지만, 천천히 변화시켰다. 그 변화가 너무 자연스럽다. 부작용도 있다. 자다가도 재밌어서 벌떡 일어날 것 같은 글쓰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 진짜 자뻑으로 시작했는데, 이젠 너무 어렵다. 내 글이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지고, 매번 과연 잘 쓸 수 있을까 두려움에 떤다.
그래도 계속 쓴다. 고행처럼 숙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