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한다.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나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처럼, 나 역시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면 남은 시간은 기적적으로 순항할 것이라는 어렴풋한 환상도 있었다. 하지만 결혼 후 남성과 여성이 각자 수행해야 할 역할이 우리네 인생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바꿀 것인지, 그 누구도 속 시원히 말해준 적은 없다.
아버지는 내게 늘 "열심히만 한다면 네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어. 옛날이랑 요새는 다르다"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은 물론 변했다. 하지만 결혼 후 여성의 역할에 있어 미묘한 변화는 있었을지언정, 임신과 출산, 엄마가 된다는 점에서 그 원초적 무게는 여전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가져온 대가로 책임을 져야 했듯, 가장으로서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은 무거운 족쇄였을지 모른다. 임신과 출산의 숙명은 비단 성차별적 역할 분배가 아니었다. 그것이 동물로서 모든 인간이 번식과 번영의 사회에 기여해야 하는 원초적 역할 분배였다는 사실에 무지한 채로 결혼했다. 변한 사회가 나를 여전히 능력 있는 여성으로 받아줄 것이며, 함께라면 우리는 다를 거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큰 아이는 계획 임신이었다. 아이의 임신기간 중, 우리는 이민을 감행했다.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새로운 곳에서 생활에 적응하며 아이를 낳고 육아를 했다. 그때의 계획은 단순했다. 육아와 적응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인생은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육아는 생각보다 지치는 일이었다. 초보 엄마였던 나에게 '이 시간이 행복'이라는 빛과 같은 확신은 늘 둔했다. 우리는 첫째 출산 후 변화된 삶을 금세 인지하고 다음 선택지를 고민했다. 내가 사회로 나가거나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둘째를 수년 후로 미룰 것인가, 아니면 일단 둘째까지 후다닥 낳고 키운 뒤 생각할 것인가.
그 뒤로 10년, 나는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계획하지 않았던 셋째와 넷째의 임신, 육아에 집중하고 싶었던 내 가치관의 미묘한 변화, 그리고 우리가 함께 견뎌야 했던 크고 작은 사고들의 시간은 급행열차처럼 빨랐다. 나는 어느새 행복한 육아맘이자, 소위 말하는 경단녀가 되어 있다. 결혼은 우리에게 원래 가려던 궤도와는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마흔을 코앞에 두고, 나는 깊은 우울의 시간을 보낸다. 어린 시절 꿈을 향해 달렸던 그때와 달리, 인생은 중반을 향하고 있었고, 문득 돌아보니 나는 어디쯤 와 있는 걸까 하는 질문에 멈춰 서야 했다.
네 아이의 엄마로 살아온 시간들, 이것이 내가 원하던 삶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이루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성취가 없는 삶도 의미가 있을까?
내가 느낀 우울은 남과의 비교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 존재의 의미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고, 성취해야만 가치 있는 존재일까? 사회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의미를 증명해야만 할까?
다행히도, 나는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의미란 반드시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것을.
그 시기를 극복하게 해 준 것은 ‘나의 쓸모’를 재발견하는 것이었다. 가족에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닫고,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해내는 것. 무엇이든 시작해 보는 용기였다. 나는 아이들 학교에 부모헬퍼로 참석하거나, 베이킹 수업 진행, 커피숍 알바 등 여러 가지 일을 융통성 있게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고민과 망설임을 뒤로하고 대학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어떤 일이든 내 생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낯설고 두려웠지만, 걱정과 우려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뀌는 순간, 나의 쓸모가 다시 생겨났다. 그렇게 삶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시작은 마법과 같다. 새로운 배움, 새로운 도전은 삶에 설렘과 생기를 준다. 아주 작은 성취들이 쌓이며 삶에 대한 감각이 돌아올 것이다. 삶의 의미는 거창한 목표를 달성해야만 얻는 것이 아니다. 내 모든 경험과 느끼는 감정 자체가 나를 만드는 의미가 된다.
결혼 생활은 다양한 감정과 역할의 총집합체이며, 자아가 소멸되는 과정이 아닌 다각화되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모든 성찰과 새로운 선택은 가정이란 단단한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경력 단절로 인한 멈춤은 단순히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가장 생산적인 시간이었으며, 나 자신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색의 시간이었다.
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다르게 존재했을 뿐이었다.
10년을 온전히 엄마로 지내는 동안, 나는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내 의미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학업으로 돌아온 나는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 10년이 내 일부이기 때문이다.
결혼은 자아를 희생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를 정의하고, 기존의 틀을 깨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아이를 낳고, 가족을 돌보느라 잠시 멈춘 것 같던 시간은 오히려 나를 다시 나로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은 내 안의 본질을 더 깊게 확장시키는 여정이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결혼이 나를 가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다시 이끌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결혼은 나를 멈추게 한 제도가 아니라, 내가 다시 걸어 나올 수 있게 한 시작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