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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결혼예찬 11화

10화. 사랑의 갱신

결혼은 한 번의 약속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이다.

by 아타마리에

잃을 것이 없는 상태의 자유

작년 남편 회사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평온한 일상을 깨는 작은 균열이었다.

남편이 조심스럽게 "만에 하나…"라며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웃으며 답했다.

"걱정 마. 혹시라도 그럴 일이 생긴다면, 그동안 충분히 가치를 증명했으니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면 되지… 그전에 여행도 가고! 만약 새 직장이 천천히 구해지면, 내가 졸업할 때까지 작은 집으로 이사 가면 되잖아."

그 말을 하던 나는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았다. '방법은 다 있겠지. 어떻게든 살 거고, 결국 우리는 행복해질 테니까…‘ 나는 잃을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그 평정심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행복의 완전한 정의

우리의 첫 뉴질랜드 보금자리는 인슐레이션도 안 되어있던 1960년대의 낡고 추운 집이었다. 처음 이사를 들어가던 날, 여기 귀신의 집 같다며 마주 보고 웃음을 터뜨린 그때가 생생하다. 어린 두 아이들을 재워놓고 밤마다 페인트 칠을 하고 타일을 붙이며 밤을 지새웠다. 일을 끝내고, 공사장인지 집인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맥주캔을 부딪치던 시간은 마법 같았다.

지금보다 가진 것이 훨씬 적었지만, 그 시기는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로 새겨져 있다. 왜였을까? 행복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함께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온전히 우리 것이었던 그 시간. 추운 겨울 패딩을 껴입고 하얀 입김을 내며 식탁에 모여 앉아 먹던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은 우리 행복의 완전한 정의였다.




돌이키는 순간 배가되는 행복

덜 좋은 집에 살거나 오래된 차를 탄다고 해서 인생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행복은 우리가 가진 것이나 잃은 것과 상관없이 스스로가 선택하는 삶에 대한 태도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불행은 결핍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과 비교에서 온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순간이 얼마나 충만한 것인지에 감사하며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행복은 돌이키는 순간 그 가치가 배가된다. 지나온 행복한 순간을 곱씹고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현재의 또 다른 행복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새긴 발자국은 곧 세월의 깊이가 된다. 그래서 긴 세월을 함께 살아가는 부부의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이다. 남편의 흰머리와 주름살이 밉지 않고 사랑스러운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 주름 하나하나가 우리가 함께 견뎌내고 만들어낸 시간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지난 결혼생활을 돌아보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굴곡을 함께 지나왔다.

함께 삶을 시작하겠다는 용기, 낯선 땅으로의 이민, 차가운 집의 밤, 아이의 병원 간호, 가족의 죽음과 깊은 우울,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환희까지. 그 모든 순간을 버티게 한 힘은 거창한 용기가 아니었다.

매일 밤 같은 침대에 누워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는, 그 작고 반복되는 일상이 쌓여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라는 복리에 사랑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매일 갱신되는 서약

결혼식 날, 우리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부유하거나 가난할 때나, 아프거나 건강할 때나 변함없이 사랑하고 보살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당시엔 몰랐다. 그 서약은 한 번으로 끝나는 약속이 아니라, 매일 새로 갱신해야 하는 삶의 의지라는 것을. 사랑은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진화하는 것이다. 처음의 뜨거운 설렘은 신뢰로, 불안했던 열정은 깊은 존중으로 변했다. 초반의 사랑이 식은 자리에, 더 단단하고 뿌리 깊은 무언가가 자리 잡아간다.


결혼은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이 아니다. 매일 아침 눈 뜰 때, '오늘도 이 사람과 살아가겠다'라고 선택하는 그 순간이 곧 사랑의 갱신이다. 피곤해도 같은 침대에 눕기로 하는 결정, 화가 나도 대화를 멈추지 않기로 하는 의지, 지쳤지만 다시 일어나 가족과 밥을 먹기로 하는 선택, 끊임없이 동적 평형을 맞춰가려는 노력. 그 모든 작은 결정들이 사랑을 갱신하는 매일의 서약이었다.




진짜 두려움에 대하여

우리는 잃을 것을 걱정하기보다 지금 가진 소중함을 깨닫고, 변화 속에서도 행복을 선택할 용기를 내야 한다. 내가 진정으로 두려운 것은 무엇일까. 큰 집을 잃는 것? 좋은 차를 포기하는 것? 사실 나에게 진짜 두려운 것은 함께할 사람을 잃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다시 함께 만들어 갈 자신이 있다. 작은 집에서도, 낡은 차를 타고도, 우리는 처음 그랬던 것처럼 언제든 행복할 수 있다.


결혼기념일인 오늘, 나는 어제의 사랑이 아니라 오늘의 사랑을 다시 약속한다. 결혼의 진짜 서약은 한 번의 맹세가 아니라 매일의 선택임을 알게 되었으니까.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서로를 선택하는 한,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





결혼 기념일 선물 대신,

브런치북을 선물하려던 야심찬 계획대로, 결기 다음 날 마지막 화를 발행하게 되었네요.

사실, 삶이 바빠 남편과의 와인 약속은 2주 뒤로 미뤘습니다. 하지만 글을 써 내려가며 참 행복했습니다. 결혼생활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다시 다짐하는 좋은 시간이었어요.


조금 쉬었다가, ‘결혼 예찬 2’로 확장된 가족의 이야기를 써볼까 싶기도 해요. 다만 다음 브런치 연재는 이미 구상해둔 다른 주제가 있어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열 편의 연재 동안 함께 공감해주신 작가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제 글이 누군가에게 닿아 작은 위로가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기혼, 미혼, 비혼 모든 분들께

저는 이번 글로 결혼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마음껏 소문낼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오늘도, 사랑을 갱신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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