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취미 부자, aka. 덕후로서의 삶은 때로 극심한 자부심을 선사한다.
그것은 나의 행복한 시간을 넘어, 취미 없이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소통하고 굳건한 연대를 만들어 낼 때의 감격이다. 취미란 결국 세대와 배경의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이어주는 마법의 연결고리와 같다. 그 많은 연결고리 중, 40대 아줌마 혹은 이모가 가장 대화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10대 남자아이들과 조차 영혼의 단짝이 되게 만드는 특별한 공감대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다. (또 다른 하나는 다음 연재에서!)
물론 마블 팬덤이 10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 도시 곳곳에는 마블 덕후들이 잠복하듯 숨어 있고,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최근에 본 마블 영화는?”
“다음 개봉작은 무엇을 기다리세요?”
이 두 질문만 던져보면 찐 덕후와 일반 관객은 금세 구별된다. 진정한 마블 팬이라면 영화 출시일을 남자친구나 남편과의 기념일보다 더 정확히 외우는 법이니까.
나의 마블 여정은 <아이언맨 1>에서 시작되었다.
이민 온 뉴질랜드의 작은 도시 영화관에서 동생과 함께 본 그 순간은 지금도 선명하다. 원래부터 스케일 큰 블록버스터를 사랑했던 나는, 로다주가 첫 막을 올린 MCU 세계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서사를 가진 히어로들이 최초로 한자리에 모였던 <어벤저스>는 그야말로 도파민이 폭발하는 세계의 구원과 같았다. 어디서든 “어벤저스 어셈블!”을 외치고 싶던 그 가슴 뛰는 첫 경험은 나를 마블 세계관의 더 깊은 곳으로 끌어들였다.
마블의 수많은 영화들은 개별 히어로의 복잡한 내면을 탐구하면서도, 그들이 개인의 능력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한계를 분명히 한다. 그래서 어벤저스라는 집합체는 서로의 결핍을 톱니바퀴처럼 맞추며 비로소 하나의 팀으로 거듭난다. 그런 과정 자체가 인간 내면의 불완전함을 위로하고 잠재우는 서사이기도 하다. 어쩌면 팀조차 완벽하지 않기에, 수많은 팬들이 그들에게 깊은 공감과 애달픔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끌어안는 이야기는 언제나 가장 강력한 드라마이니까.
그렇게 나는 약 15년에 걸쳐 마블에 깊이 빠져버렸다.
개봉하는 영화는 누구보다 빠르게 영화관으로 달려가야 했고, MCU 페이즈 1–3(엔드게임까지)의 20편이 넘는 작품들은 이미 세 번 이상 정주행했다. <엔드게임> 이후의 영화들 역시 극장과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두 번씩은 완주했다. 이제 나의 일 년은 마블 영화의 출시 일정으로 스케줄이 정해진다. 영화를 기다리고, 관람하는 그 몇 번의 개봉과 함께 한 해가 ‘뚝딱’하고 순삭 되는, 마치 영화 같은 신비로운 시간 경험이 반복된다.
마블의 히어로들이 매혹적인 이유는 단순한 액션 때문만이 아니다.
각각의 입체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교한 과학적 구현, 복잡한 퍼즐 조각처럼 흩어졌다 뭉치며 맞춰지는 세계관, 통쾌한 액션의 카타르시스.
하지만 마블의 진정한 힘은 절대 선과 절대 악을 완전히 구분할 수 없게 만드는 인간(또는 생물)의 다층성에 있다. 수많은 빌런들에게조차 서사를 부여해 철학적 질문을 던지게 하고, 다양성과 소수자(Minority)를 포용하는 시대적 가치를 담아내며 영화 이상의 문화로 확장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집의 마블 팬은 나 혼자가 아니다.
마블 덕후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또래보다 일찍 MCU를 접했고, 이제는 모든 영화를 정주행 한 것은 물론, 백과사전을 외우듯 방대한 세계관을 꿰뚫고 있다. 그 덕에 올해 개봉한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나 <썬더볼츠> 같은 신작들은 막내를 제외한 다섯 식구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개봉일에 맞춰 영화관에 입장했다. 이렇게 취향을 함께 나누어주는 동료들이 있으니, 나의 덕질은 결코 외롭지 않다.
마블 영화가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아이들과 함께 개봉일의 희열을 나누는 시간이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히어로들의 또 다른 구원에 내 심장이 계속 두근거리기를 바라는 마음.
그리고 언젠가 할머니가 되어서도 극장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이 모든 것이, 세대와 시대를 가로질러 공감과 연대를 만들어내는 한 마블 팬의 영원한 염원이자 삶의 작은 철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