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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치유하는 가장 달콤한 화학반응식

Baking

by 아타마리에

대문자 E로 시작하는 나의 성격은, 고등학교 시절 두 번의 이민을 거치며 깊은 내향의 세계로 밀려들었다. 낯선 환경, 사라진 언어, 문화적 단절감 속에서 사춘기의 나는 마치 거친 파도 위에 홀로 떠 있는 섬 같았다. 무언가를 붙잡으려 애쓸수록 세상과의 연결은 희미해졌고, 그 시절은 길고 어두운 터널처럼 느껴졌다.


이곳의 대부분 주택에 오븐이 빌트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용법조차 몰랐던 이 거대한 도구를 처음 접한 건 고3 무렵이었다. 이민 초기, 이웃의 친절한 한인 아주머니가 홈메이드 케이크와 빵들을 만들어 주셨다. 그 맛과 우아해 보이는 행위에 매료되어, 나도 오븐을 사용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족 간의 교류로 친분이 쌓이고 나서,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베이킹을 배우기 시작했다. 침잠해 있던 고3의 소녀에게 따뜻하게 재능 기부를 해주신 그분은 지금도 좋은 어른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알고 보니 그분은 한국에서 베이킹 클래스를 운영하던 숙련자셨고, 그때 나는 앙금과자, 소보로빵, 타르트, 생크림 케이크까지 오가며 새로운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먹기와 만들기,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는 신개념 ‘덕질’의 시작이었다.


분명 그 시절의 나는 손으로 잡히는, 확실한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베이킹은 우울의 심연을 걷던 내게 가장 확실한 형태의 화학반응식이었다. 가루와 액체가 혼재된 원재료를 인풋으로 넣고, 정교한 비율과 뜨거운 온도를 지나 누구나 사랑하는 아웃풋인 빵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 당시 나의 흐릿한 정체성과는 달리, 그 결과물은 언제나 확실했고, 맛있었고, 존재의 기쁨을 증명해 주는 지극히 현실적인 증거였다. 당시 나는 친구도 없었고, 한국과 달리 학원도 다니지 않았다. 오후 세 시면 집으로 돌아와 홀로 공부하며 대학 시험을 준비했다. 그런 고립된 일상 속에서 베이킹은 단비 같은 창조 행위였다.


대학 입학 후 나는 더더욱 베이킹에 빠져들었다. 독학으로 심화된 기술은 점점 취미의 영역을 넘어섰고, 어느새 완벽을 추구하는 덕후에 가까워졌다. 프랑스 빵이며, 케이크 데코레이션이며 요리책은 넘쳐났고, 나는 매일 그 실험으로 바빴으며, 가족들은 거의 강제 시식을 해야 했다.


나의 작은 성취감과 기술 연마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혼 후 마카롱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꼬끄를 완벽히 익히기 위해 하루에 계란 서른 개를 썼다. 생각처럼 되지 않아서 오븐 온도를 5분 단위로, 마카로나주의 묽기를 미세 단위로 바꿔가며 결과물을 비교하는 실험은 매일 밤, 아이들이 잠든 뒤 행해졌다. 내게 베이킹은 현실의 복잡함으로부터 도피하는 동시에, 단순한 물질들을 조합해 세계 속에서 가장 완벽한 형태의 나를 찾는 거대하고 재미있는 실험인 것이었다.


네 아이의 육아로 일을 그만두었을 때도 이 취미는 여전했다. 재료비가 감당을 넘어서자, 나는 무모하게 창업을 결심했다. 웨딩 케이크와 마카롱 주문을 받아 판매하고, 베이킹 클래스를 열기도 했다. 이 정도면 삶과 맞닿은 효자 같은 취미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사실 그래도 쓴 돈이 더 많다는 게…) 하지만 취미가 본업이 되는 순간, 베이킹은 더 이상 순수한 기쁨이 아니었다. 이익 창출의 굴레 속에서 창조의 즐거움은 점점 희미해졌고, 여러 이유로 나는 그 자리를 내려놓았다.


다행히 이제 베이킹은 다시 취미의 자리를 되찾았다. 지난 11년 동안 네 아이와 남편의 생일마다 가장 특별한 케이크를 손수 만들어왔다. 평생 엄마표 케이크로 생일을 축하해 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이제 베이킹은 나에게 가족들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가장 단순한 허기를 채우는 일에서 시작된 베이킹은, 내 삶의 복잡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제조를 넘어, 낯선 땅에서 나라는 존재를 확고히 뿌리내리게 한 창조 행위이기도 했다. 그때는 예술이기 이전에 생존이었고, 외로움의 어둠을 뚫고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해 준, 변치 않는 실존적 성취감의 원천으로 남아있다. 세월의 무게 앞에 함께 성장해 온 나의 취미, 나의 사랑 베이킹, 어떻게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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