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삼성썬더스
농구를 좋아하게 된 건, 내가 기억이 나지 않던 언젠가부터 아빠 손을 잡고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하면서였다. 허재 선수를 유난히 좋아하던 아빠는 스포츠광이었다. 거실의 텔레비전에서는 늘 농구나 축구 중계가 흘러나왔고, 나는 누군가의 함성 소리와 화면 속 중계를 들으며 자랐다. 텔레비전 밖에서도 이어지는 아빠의 사심 가득한 해설과 열정적인 설명은, 어린 나에게 스포츠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주었다. 대학농구에서 프로리그로 넘어가던 그 시절의 함성과 관중석의 떨림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중학생이 되던 겨울방학, 아빠와 함께 잠실체육관에서 본 경기가 있었다. 기아와 수원 삼성이 맞붙던 날, 한 선수가 연속으로 쏘아 올린 3점 슛이 내 심장을 완전히 빼앗아갔다. 그는 바로 ‘람보슈터’, 나의 영원한 오빠, 문경은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인왕 출신의 주희정이 삼성에 합류하면서 나는 ‘수원 삼성 썬더스’의 팬이 되었다.(지금은 서울삼성) 그가 코트 위에서 드리블을 할 때마다, 나는 슬램덩크의 송태섭을 떠올렸다. 처음 본 그의 정직한 눈빛과 막힘없는 드리블을 기억한다. 지금이야 KBL 레전드이지만 그 당시엔 신인 중의 초신인이었다. 당시 우지원, 이상민 선수 팬들 앞에서 “주희정이 짱”이라고 입을 놀려댄 게 헛되지 않았다고, 지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마 나는 그때 처음으로 좋아한다는 감정의 구조를 배웠던 것 같다.
덕질의 시작은 뜨겁고 단순했다. 다행히 농구 광팬인 아빠가 있었기에 그 길은 외롭지 않았다.
“시험 점수가 좋으면 시즌권을 끊어주겠다”는 아빠의 말 한마디는 내 중학교 시절의 최강 동기부여가 되었다. 나는 전교 5등권을 놓치지 않았다. 시즌권을 손에 쥔 나는 아빠는 물론이고 친구까지 농구의 세계로 끌어들여 함께 경기를 보러 다녔다.
나는 안양, 서울, 수원을 오가며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탔다. 경기장 굿즈 판매대 앞에서 반짝이던 엠블럼과 선수 이름이 적힌 카드들은 나의 최고 관심사였고, 시험기간에는 하드보드지와 칼을 들고 플래카드를 만들다 엄마가 들어오는 소리에 후다닥 침대 밑에 숨기곤 했다. 신인 드래프트나 용병 드래프트가 다가오면 선수들 분석은 기본이고, 기도까지 하며 우리 팀 전력이 좋아져야 한다고 극성을 부렸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이런 광팬은 처음 본다”며 혀를 찼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경기가 끝나면 버스를 쫓아가고, 선수들이 내 목소리를 들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음성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겼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를, 그 사람의 시간에 내 마음을 얹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되었다.
덕질은 취미나 취향으로 말하기엔 벅찬 다른 무언가다. 그것은 그들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었고, 헌신이자,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등학교에 가까워지며 내 덕질은 점점 잦아들었다. 고입과 현실, 혹은 다른 사랑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사실은 축구로 옮겨갔다) 요새 농구팀을 하는 아들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 순간 코트의 공기 속에서 내 안의 소녀가 깨어난다. 그 시절의 함성, 그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던지던 그 열정이 되살아난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덕질이란 사랑의 연습이었다고. 누군가를 응원한다는 건, 그 사람의 시간이 나의 일부가 되는 일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은 나 자신을 응원하는 힘으로 되돌아온다. 농구를 좋아하던 어린 날의 내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좋아한다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누군가의 성장에 내 감정을 얹을 수 있다는 건,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어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 안의 슬램덩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코트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있고,
누군가를 뜨겁게 좋아할 수 있었던 그 마음은 한 번도 식지 않은, 내 인생의 첫 번째 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