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굿바이 앙키타

통총 데이즈 (Thung Chung Days) 캐빈 크루 트레이니 일기

by 니나



홍콩식 명 퉁청 Thung Chung.

우리가 부르던 한국식 이름 통총.


습하고 축축하던 통총에서의 그날들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동안 나는 캐빈 크루 트레이니(캐빈 크루 직업 훈련을 받는 사람)였다.


내가 머물던 시간은 겨우 40일이었지만, 내게 그곳은 이상하게도 진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라도 풀어내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의 날들. 나의 통총 데이즈.



앙키타는 내가 머물던 F호텔의 같은 층에 묵었던 인도인 여자친구였다.

어느 평일 아침, 회사로 가는 셔틀버스의 옆자리에 우연히 같이 앉게 되었고 상냥하게 미소 짓는 얼굴에 말을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곧 친구가 되었다.



그간 나와 같은 층에 있는 여자친구는 아무도 없었고 앙키타를 알게 된 이후로 시간이 날 때면 짧게라도 인사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의 방문을 자주 두드렸었다. 그러면 또 그때마다 앙키타는 대개 자기 방에 있었다. 그녀도 교류하는 배치 친구들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앙키타의 트레이닝 스케줄은 나 보다 한 주 앞서고 있었고 나와 함께 홍콩으로 왔던 다른 한국인 친구들과도 다른 배치에 소속되어 있었다. 호텔의 같은 층을 쓰고 있다는 것 외에 우리의 교집합은 없었다. 하지만 앙키타가 나 보다 먼저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것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늘 언니처럼 침착한 모습의 앙키타가 당연히 내 또래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나보다 다섯 살은 어리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녀가 내게 언니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앙키타 성격이 상당히 차분하고 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이나 미뤄진 나의 트레이닝은 만반의 준비를 하기보다는 어설픈 배회와 불필요한 걱정만 늘려 놓았었고 트레이닝이 막 시작했던 시기는 그 답답함이 극에 달했었다. 또 트레이닝 스쿨에서 진행되는 수업 진도 외에 꼭 이수해야 했던 온라인 교육은 양이 너무 많아서 쉬는 날이라도 있는 때에는 호텔 방에 박혀서 하루 종일 노트북만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러면 그 하루가 어찌나 길고 무거운지, 라면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온라인 교육에 나오는 시험 문제를 함께 풀고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하나 없다는 게 참 아쉬웠었다. 앙키타와는 인종도 언어도 배치도 달랐고 진도도 일주일이나 다르기에 그런 긴밀한 관계가 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 어떻게 지냈어?”를 물어볼 수는 있었다. 옆 집 이웃처럼 말이다.




회사에서 호텔로 돌아온 저녁 6시 즈음이면 종종 앙키타 방을 두드려 그런 수다를 떨었다.

앙키타는 공부를 할 때도, 쉴 때도 늘 침대의 이불 속에 들어가 있었는데 그러면 나는 자연스레 그녀 침대 위 맞은편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서로의 배치와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하루 동안의 피로가 금세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앙키타는 초반에 내게 온라인 교육을 미리 다 들으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면 수업 외 온라인 교육을 이수해야 하는 숙제에 대한 부담이 없을 것이고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수업시간 인스트럭터의 기습 질문에 대한 두려움도 단지 집중만 한다면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조언을 받아들여 황금처럼 소중했던 휴일을 꼬박 써서 거의 모든 온라인 교육을 전부 들어 놓았다.



이렇게 숙제에 대한 부담감은 사라졌지만 지나고 보니 앙키타와 내가 간과했던 것은 서로의 위치였다.

앙키타는 인도의 여성 크루만이 일한다고 알려진 항공사에서 몇 년이나 일했던 엑스 크루였고 나는 아무런 기초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신입이었다. 인스트럭터는 트레이니들이 온라인 교육을 들었으니 그날 다뤄질 수업 지식을 대부분 이해하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수업에 들어왔고, 배치 학생들 중에 전직 비율이 많은지에 따라 그 속도가 더욱 천차만별이었다. 당연히 우리 배치의 수업 속도는 더욱 빠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에게는 수업 진도에 맞춰서 온라인 교육 내용(기본적인 지식)을 듣고 다시 또 들으며 외우고 반복하는 것이 중요했다. 단지 수업 내용만 쫓아가서는 턱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기에 어렵사리 이수했던 온라인 교육을 반복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앙키타는 노트북을 아예 가져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녀 배치의 진도가 이베큐에이션에 들어갈 즈음 앙키타는 내가 온라인 교육을 다 들은 것을 알게 되었고, 나의 랩탑을 하루 빌려 달라고 했다. 한국인만 하더라도 노트북을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어서 내심 놀랐지만 하루쯤 앙키타에게 내 노트북을 빌려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의 노트북을 빌려주기로 한 날, 앙키타의 방문을 두드리던 저녁이었다.

여느 때와는 다르게 기척이 없었다. 앙키타가 방에 없나 했는데, 곧이어 문이 열렸고 거기에는 눈물범벅이 되어 있는 앙키타가 있었다.



“어머... 앙키타 대체 무슨 일이야.. 너 괜찮니?”

“나 오늘 이베큐에이션에서 떨어졌어..” “나 탈락이야...” 탈락이라는 말을 하고 앙키타는 목놓아 울었다.



그날은 앙키타 배치의 이베큐에이션 마지막 시험날이었고 그것이 앙키타 배치 트레이니들에게는 재시험이자 마지막 시험 혹은 첫 번째였을 수도 있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네가? 여태껏 한 번도 재시험 본 적 없잖아..”

“모르겠어. 이제 끝이야. 난 집으로 돌아가야 해...”





늘 평정심을 갖추었던 앙키타는 탈락이라는 좌절 앞에 한참을 울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었고 너무 마음이 아팠다. 대체 ‘이베큐에이션’이 뭐길래 앙키타 같은 베테랑이 탈락을 하는 건지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날의 시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앙키타는 이후의 나처럼 큰 실수를 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단지 오늘 탈락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나 보다 딱 한 주 앞선 진도를 밟고 있었다. 앙키타에게 빌려주려고 가져온 노트북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졌다.




이베큐에이션 과정의 엔딩이 얼마나 살벌한지 모르던 나는 순진하게 앙키타에게 인스트럭터에게 다시 물어보자고 했다. 다시 시험 볼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마치 거짓말처럼 앙키타가 내일부터는 트레이닝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서 물어보자고 했다.



“앙키타, 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지만... 너는 여태까지 잘 해왔으니까 한 번만 다시 기회를 달라고 물어보면 어때? 혹시 모르잖아... 떠나야 하더라도 물어봤으면 좋겠어.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낫잖아...”

“아니야... 이제 그럴 수 없어.”




앙키타는 그녀의 트레이닝은 이제 끝이라며 다시 물어보는 건 의미 없는 행동일 거라고 했다.

단정하는 그녀의 대답이 의아하고 아쉬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앙키타는 이미 그날 내가 나중에 겪었던 이베큐에이션 탈락의 피날레를 이미 장식하고 온 모양이던 것 같다. 그런데 이튿날 트레이닝 스쿨에서 우연히 앙키타를 보았고, 내심 앙키타가 결국 다시 시험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물어보러 왔다는 생각에 왠지 울컥할 만큼 그녀가 대견했다.



그녀는 다음날 인스트럭터에게 재시험을 볼 수 있는지를 물어도 보았지만 사실은 트레이닝 종료 처리를 하기 위해 회사에 왔던 거였다.



앙키타는 트레이닝에서 떨어진 지 채 3일이 안되어 호텔 방을 정리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속상해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고 마음이 아픈데 또 금방 떠나버리니 내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졌다.



앙키타가 탈락했던 날 침대 위에서 그녀는 내가 꼭 세이프티 트레이닝에 패스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너는 할 수 있을 거라며, 회사의 유니폼을 입은 내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열흘 후 내가 짐정리를 하던 날 밤, 통총 거리를 걸으며 불쑥 앙키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앙키타, 잘 지내고 있어? 보고 싶다.”

“나도 네가 보고 싶어. 난 괜찮아. 그런데 집에 오니 홍콩이 그리워..”

“그렇구나.. 난 이제 내일모레면 집에 돌아가. 오늘 회사에서 사직서를 썼어. 기분이 이상해. 네게 꼭 트레이닝을 통과했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잘 안 됐어.”

“괜찮아.. 앞으로 잘할 수 있을 거야.”

“고마워. 너는 당연히 잘할 거야. 나중에 다시 이 회사에 지원할 생각이 있어?”

“아니.. 난 더 이상 그 회사에 가고 싶지 않아.”

“그렇구나.” “앙키타, 언젠가 너를 만나러 델리에 갈게.”

“꼭 와야 해. 내가 이곳을 구경시켜 줄게. 참 재미있을 거야.”

“그러게. 앙키타. 너무 기대된다." "또 연락할게. 고마워.”

“천만에.. 잘 있어.”




IMG_4824.HEIC 전화기 속 앙키타의 목소리가 이토록 친근하고 생생한데 우리가 다른 하늘 아래 있다는 게 야속했던 밤.




너무나 원하는데도 때로는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큰 꿈을 가지고 홍콩에 온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슷한 처지의 또래 친구를 만나 기숙사 메이트처럼 함께 시간을 보냈던 그 이야기만으로 감사하다. 앙키타를 통해 느끼고, 배운 것들이 참 많았으니까.


여분의 면봉이나 솜, 샤워기 필터에 스팀다리미며 온갖 부수적인 것들까지 챙겨 왔던 나와는 다르게 가장 필수적이라고 생각되는 노트북도 없이 대신 부피가 큰 진짜 주방 도구들을 가져온 앙키타의 방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아이 같다고 느꼈는지 모른다. 앙키타는 내게 어른스러움 뿐만 아니라 보고 경험했을 때 느낄 수 있는 부끄러움까지도 알려주었다.




앙키타는 작년에 인도로 돌아간 지 1년이 안되어 다시 이전 회사에 복귀했다. 그녀는 이제 다시 인도의 유일한 여성 크루 항공사의 승무원이 되어 비행기를 탄다.


쓰라린 시간을 견디고 다시 노력해 그녀를 행복하게 만드는 자리에 돌아가기까지 있었을 앙키타의 노력이 대단하고, 실제로 보여준 강인한 의지에 큰 영감을 받았다.



언젠가 내가 바라고 꿈꾸던 일을 하며 어느 새로운 나라 혹은 어느 낯선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싶은 친구들이 참으로 많지만, 그중에서도 앙키타를 만나면 왠지 왈칵하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우리가 같은 이유의 눈물을 흘려서일까,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그동안 노력했다는 것을 언니에게 자랑스레 보여주고 싶은 동생 같은 마음에서 일까.



오늘은 오랜만에 앙키타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





keyword
이전 15화MERCY ~종잇장 같은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