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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you can..." Emy 2

통총 데이즈 (Thung Chung Days) 캐빈 크루 트레이니 일기

by 니나

홍콩식 명 퉁청 Thung Chung.

우리가 부르던 한국식 이름 통총.


습하고 축축하던 통총에서의 그날들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동안 나는 캐빈 크루 트레이니(캐빈 크루 직업 훈련을 받는 사람)였다.


내가 머물던 시간은 겨우 40일이었지만, 내게 그곳은 이상하게도 진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라도 풀어내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의 날들. 나의 통총 데이즈.



난 어렸을 때부터 비행기가 좋았다.

비행기를 타면 내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한없이 신기하고 설렜다. 드물게 보는 외국인이 아니라 비행기에서 내리기만 하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다르게 생기고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한다는 것,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단숨에 바뀌어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곳에서 보는 새로운 것들이 너무나 짜릿했다. 그런 특별함을 선사해 주는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공항이 좋았고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고 싶거나 마음에 특별한 위안을 얻고 싶을 때면 일부러 공항에 놀러 가곤 했다.



홍콩 국제공항 입구에는 초기 비행기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마침내 어른이 되어 통총에 오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비행기가 보였다.

낮이건 밤이건 단지 10분 정도만 있으면 홍콩 국제공항을 오고 가는 비행기가 날아다녔다. 하루동안 녹초가 되어 쓰러질 것 같아도 호텔 방을 나서 조금 걸어가면 머리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가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에머슨의 방으로 향하는 저녁에도 하늘을 보자 피곤함이 금세 잦아드는 듯했다. 어느덧 내 발걸음은 그렇게 활기차 있었다.




N호텔은 내가 있던 F호텔 보다 객실의 크기가 넓었다. 이전에 유행했을 법한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이 특징이었는데 신축 같지 않은 호텔 특유의 오래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고즈넉한 깔끔함이 N호텔의 특색이라면 특색이었다. 특히 로비 천정에 걸려 있는 커다랗고 화려한 샹들리에는 지금이 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의 어느 날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욱이 호텔 밖 풍경이 어두워진 저녁에는 명암의 대조로 인해 N호텔에만 들어서면 꼭 다른 시간대 어느 무도회장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넓은 로비를 지나 방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고 목적한 층에서 내리면 펼쳐지는 통로처럼 길고 어두운 복도에 더욱 누군가를 ‘찾아간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한 사람의 방에서 그 사람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호텔의 객실은 늘 깔끔한 상태의 디폴트 값을 유지하는 장소라서 투숙객의 색깔을 덧입히기 어렵지만 그 기간이 한 주, 두 주가 넘어가고 한 달이 차면 어느덧 확고한 색깔을 띠기 마련이었다.



방문을 열고 밤에 다시 만난 에미는, 회사에서 내게 설명을 해주었을 때부터 조금 짐작을 하긴 했지만 늘 졸려하던 회사에서의 그가 아니었다. 쌩쌩하다 못해 명랑해 보이는 얼굴이 정말이지 다른 사람 같았다.




그의 방은 한마디로 넓고 상당히 심플했다. 깨끗한 방 끄트머리 창문 옆 탁자 위에는 노트북으로 영화가 틀어져 있었다.(영화라니! 그는 이 힘든 ‘이베큐에이션’ 기간에 영화를 보고 있었다. 에미는 영화를 좋아했다.)

같은 반 친구가 온다고 방을 조금 치웠을지도 모르지만 자잘한 먹거리나 어지러운 짐 따위 혹은 남성 캐빈 크루의 필수품인 헤어 제품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두 달가량 호텔에 살 생각으로 왔으면서 이렇게 콤팩트한 규모라는 게 놀라웠다.



대신, 친구들의 방을 갈 때마다 보았던 특이점이 에머슨에게도 하나 있었다. 에머슨에게 마치 내 방의 요가매트, 마크 방의 대규모 헤어 제품, 발카의 아버지와의 사진을 담은 큰 액자 같은 것은 바로 기타였다. 인도처럼 먼 곳에서 홍콩에 오려면 생필품 만으로도 가방이 턱없이 부족할 텐데(소포를 받기도 한국보다 어렵지 않은가.) 통기타를 들고 온 것이었다.



“우와. 너 기타를 들고 온 거야? 어떻게?!”

“응. 기타는 내 베이비야. 비행기 안에서 내내 이렇게 (기타를) 안고 있었어.”

“기타를 연주하는구나!”

“응.. 기타 연주가 내 취미야..”

“멋지다!”



나의 F호텔 방과 비교하면 마치 거실처럼 느껴지는, 오렌지 빛의 넓은 에머슨 방에서 만난 에머슨의 진짜 모습은 굉장히 Chill 한 친구라는 거였다. 수업시간에 웬만해서는 긴장도 하지 않고 필기시험을 보면 쉽게 100점을 맞고 단지 빡빡한 트레이닝 스케줄에 늘 피곤해하던 그의 느긋함이 자기 방에서 완연히 드러났다.



“뭐라고? 응급처치 시험 볼 때 두 시간만 공부하고 잤다고?”

“응. 회사에서 돌아와서 바로 잤어.. 너무 졸려.. 그리고 일어나서 이발하러 갔다가 돌아와서 저녁 먹고 두 시간 공부했어..”

“거짓말이지... 나는 그날 거의 못 잤는데..”




사실 시간이 이르지 않았으므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그전에 서론이 빠질 수 없었다.


난 이베큐에이션 과목의 인스트럭터 때문에 상당히 괴롭다는 말, 수업을 능숙하게 따라가기 위한 비행 경험과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것 같다는 말을 줄줄 했다.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던 에머슨은 곧 자기 노트북의 영화를 끄고 온라인 교육의 가장 처음 부분인 비행 원리를 설명하는 강의를 틀었다. 그리고는 원리를 공부해 보자고 했다.



“자, 이제 처음부터 이걸 보는 거야. 보다가 이해가 안 되면 바로 물어봐..”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말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온라인 교육을 들었을까. 혼자서 공부할 때 이미 한 번 봤던 강의라서 익숙했지만 나의 마음가짐이 비장하니 익숙했던 내용도 다시 새롭게 다가왔다. 중간, 중간 에미는 부가 설명을 덧붙여주었고 머릿속에 흐릿하게 있었던 내용들이 조금씩 뚜렷해졌다. 그리고 내 의도와는 다르게 점점 나의 누적된 피곤함과 졸림이 발 끝에서부터 올라와 저절로 눈이 감기는 듯했다. 너무 잠이 왔다. 마치 수업 시간에 있을 때처럼 정신을 깨우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르겠다.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나는 에머슨에게 말했다.



“조금 쉬었다 볼래?”

“좋아. 잠깐 쉬자..”



그리고 자연스럽게 엑스 크루였던 에미가 홍콩에 오게 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벵갈루루에서 온 에미는 원래 파일럿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파일럿이 되기 위한 과정을 밟기에 여러 가지 여건이 맞지 않았고 경영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친구들과 작은 사업을 시작했는데 결과가 그렇게 좋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코로나 시기를 맞아 캐빈 크루를 지원하게 되었고, 그 길로 2년간 비행기를 탔던 거였다. 영리한 친구이므로 무엇을 배우든 잘 익혔겠지만 에미에게도 지금 회사의 트레이닝 기간은 모든 걸 다 배우고 익히기에 상당히 짧다고 했다. 인도에서 자기가 트레이닝을 받을 적에는 그 기간이 3개월이었다다면서 엑스 캐빈 크루에게는 빨리 끝나니 좋지만 뉴비에게는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 말고도 파일럿이 되고 싶었다는 다른 캐빈 크루 친구를 봤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어린 나이에 사업을 할 생각을 했다는 것과 또 직접 해봤다는 거였다. 그런 도전을 했던 친구라면 일찍이 홍콩에 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에머슨은 방 한편에 놓아져 있던 기타를 꺼내 들어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부르는 노래는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한 팝송이었는데 한 밤의 잔잔했던 분위기와 어우러졌다. 언젠가 내가 홍콩에서 트레이닝을 받던 시절을 떠올리면 기억에 남을 장면이 될 것 같았다.


‘맞아. 친구가 들려주는 기타 연주와 노래는 이렇게 좋은 거였어.’



“우와.. 에머슨, 너 정말 근사하다.”

“고마워.. 나 3년간 연습했어..”



이전에 프랑스에 살았을 때 친구들 중에 기타를 연주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대개 늦은 밤,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장소에서 그들이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함께 그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시간에 푹 빠지는 경험을 하곤 했다. 그때는 많이 어려서 한 가운에 모닥불을 짚여 놓고 친구의 기타 연주와 노랫소리를 듣는 일이 얼마나 찬란했던 시간인지 몰랐다. 다른 친구들의 모습은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가도 연주를 했던 친구의 모습과 친구의 연주를 들을 수 있어 기뻤던 시간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멋진 연주를 선사해 준 에머슨에게 참 고마웠다.

기꺼이 시간을 내주면서 가르쳐주는 것뿐 아니라 좋은 추억까지 만들어 준 에미는 이렇게 단연 통총에서의 잊히지 않을 캐릭터가 되었다.



우리는 다시 이론 공부로 돌아가 학습을 마무리했다. 한 밤의 과외는 열 한시가 훌쩍 넘어서 끝났는데 내일 다시 회사에 가야 하므로 부지런히 내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 알려줘서 정말 고마워.”

“천만에.. 나는 숟가락으로 직접 떠먹여 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친구가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지 않아.”




그렇다면, 나는 좋은 친구를 만난 거였다.


이후로도 무언가를 심도 있게 물어보고 싶으면 에미에게 물어보거나 만나서 알려줄 수 있냐고 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언제나,


“Yes... you 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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