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홍콩의 맛

통총 데이즈 (Thung Chung Days) 캐빈 크루 트레이니 일기

by 니나 Dec 28. 2024

홍콩식 명 퉁청 Thung Chung. 

우리가 부르던 한국식 이름 통총. 


습하고 축축하던 통총에서의 그날들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동안 나는 캐빈 크루 트레이니(캐빈 크루 직업 훈련을 받는 사람)였다. 


내가 머물던 시간은 겨우 40일이었지만, 내게 그곳은 이상하게도 진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라도 풀어내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의 날들. 나의 통총 데이즈.



트레이닝이 시작되며 회사에서 무상으로 제공해 주던 열흘 간의 호텔 식사가 끝났다. 



인덕션(오리엔테이션의 개념)이 시작하는 날부터 본격적인 회사 직원이 되어 샐러리(봉급)를 받게 되는데 이때부터 호텔은 숙소로서의 역할이 커졌다. 그리고 이제 식사는 전적으로 트레이니 개인의 문제였다. 


하지만 예정되었던 나의 트레이닝 스케줄이 밀리는 바람에 일주일을 더 기다려야 했고, (아직) 회사 출근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호텔에만 있어야 하는 데다 앞선 열흘이 흐르니 호텔의 뷔페식도 어느새 물린 참이었다.




호텔 방에는 전기스토브나 전자레인지 없이 오로지 미니 냉장고와 커피포트, 전기 코드만 있어서 트레이니들은 컵밥이나 컵라면처럼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간단한 조리식품들을 많이 가져오곤 했다. 이 즉석식품들은 하루의 트레이닝을 마치고 저녁 무렵 호텔로 돌아왔을 때를 대비한 저녁 식사 대용이었다. 


트레이닝을 위해 한국에서 가지고 온 비축 식량을 미리 까먹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호텔 방에서 먹는 단출한 식사마저도 지겨워지고 있었다. 난 커피 포트로 끓인 뜨거운 물 말고, 냄비에서 팔팔 끓인 그 뜨거운 국물이 먹고 싶었다. 





딱히 거창한 식사를 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뜨겁고 맛있는 음식을 생각하자 곧 베트남 쌀국수가 떠올랐다. 


그때 먹었던 닭고기 쌀국수 퍼 가(Phở gà). 


토요일 저녁, 내가 찾았던 한 자그맣고 정갈한 베트남 식당에서 통총의 지역 주민들은 둘씩 혹은 삼삼오오 모여서 저마다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뜨거운 쌀국수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니 만족스러운 배부름으로 호텔 방으로 돌아가던 발걸음이 한껏 가벼워졌다. 






호텔 앞 슈퍼마켓의 대체 우유 섹션. 

일반 우유가 아닌 오트유(귀리 우유), 두유 같은 대체 우유임에도 그 종류가 너무 많고 다양해서 홍콩의 외국인 규모가 실감 났다. 





통총에서 무언가를 먹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뜨거운 국물이 생각났고, 호텔 앞 식당에서 가장 많이 사 먹었던 닭고기 라멘이다.


호텔 앞에는 규모가 꽤 큰 비스트로(정식 요리를 판매하는 식당인 레스토랑에 비해 격이 낮고 상대적으로 저렴하며 격식을 덜 차리고 편안하게 먹는 음식들을 조리, 판매하는 곳)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베이커리류도 함께 팔았다. 


호텔의 투숙객들도 아파트의 주민들도 모두 함께 어울렸던 곳. 때로는 커피나 음료만 마실 수도 있고 푸짐한 식사를 하러 갈 수도 있는 가벼운 비스트로가 좋다.






드디어 회사 식당에서 회사 음식을 먹게 되었다. 


우리 배치 홍콩 로컬 친구들의 추천으로 처음 주문하게 된 덮밥이다. 오리고기와 닭고기를 반반씩 섞어 올린 식사였는데, 회사 식당에서 파는 음식은 통총 레스토랑에서 파는 음식들보다 훨씬 저렴했다. 무엇보다 친구들과 어울려서 먹는다는 게 좋았다.





이 메뉴의 이름은 "밥과 국 그리고 두 가지의 사이드 디쉬." 


내가 트레이닝 동안 점심시간에 가장 많이 먹었던 메뉴이다. 호텔에 지내니 밥솥에 갓 지은 밥과 냄비에 끓인 국의 평범한 식사가 늘 얼마나 생각나고 또 먹고 싶었는지 모른다.





가장 좋아했던 오리고기 덮밥. 홍콩 친구들도 대부분 나처럼 점심으로 밥과 국의 식사를 즐겼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 덮밥을 2/3는 남기는 일이 허다해졌다. 스트레스에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또다시 닭고기 라멘을 먹으러 간 어느 저녁. 어찌나 배고팠는지, 마치 게 눈 감추듯 라멘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는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것만큼이나 사 먹는 것도 익숙했기에 왠지 영양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이렇게 곧잘 식당에 가곤 했다. 


그런데 우연히 친구가 된, 호텔의 같은 층 인도인 앙키타의 방에 갔을 때였다. 앙키타 방에는 트렁크 한 면을 차지할 듯싶은 커다란 냄비와 나머지 진짜 요리 도구들이 있었다. 인도에서 그 커다란 주방 용품들을 다 가지고 온 것이다. 그녀는 식사를 주로 호텔방에서 만들어 먹었다.



사실은 취사가 금지된 호텔이었는데 회사에서 먹을 점심 식사까지 만들어 오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어떤 친구는 내게 이렇게 묻곤 했다. 


"나 네가 점심시간마다 식당에서 사 먹는 거 봤어. 너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왔니?"


회사 식당에서 사 먹는 건 호텔 주변의 다른 어떤 식당 보다 저렴했다. 또 그나마 제대로 된 식사라고 생각해 점심식사만큼은 꼭 사 먹었던 건데, 회사 식당의 식사가 비싸다고 생각하는 친구 앞에서 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게 되었다.


"응 그건 아니구.. 나 하루에 한 끼는 꼭 밥을 제대로 먹어야 살 수 있거든? 그래서 이렇게 먹는 거야." 



어느 누군가에겐 구내식당의 식사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것. 난 다른 나라 친구들에게 나의 취향이나 기호를 살며시 감추어야 했다. 내가 주로 무슨 음식을 먹냐고 물어봐 오면 혼자 근처 식당에도 종종 가고 틈만 나면 슈퍼에 가서 과일과 야채를 사 온다는 것, 가볍게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 주말 저녁에 맥도날드가 제일 싸니까 갔다는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되었다. 



혼자 먹는 식사는 함께 먹을 때 보다 맛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 그럼에도 맛있게 먹게 되지만 늘 이상하게 쓸쓸한 뒷맛을 남기고, 또 함께 먹더라도 빠듯한 시간과 식사의 의미를 잊게 하는 일정에 잠식되고 마는, 그렇게 늘 허기지고 익숙하면서도 비밀스러워야 했던 참으로 복잡한 맛. 그것이 이번에 내가 맛본 홍콩의 맛이었다.




이전 11화 당신의 이름은 교관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