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총 데이즈 (Thung Chung Days) 캐빈 크루 트레이니 일기
홍콩식 명 퉁청 Thung Chung.
우리가 부르던 한국식 이름 통총.
습하고 축축하던 통총에서의 그날들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동안 나는 캐빈 크루 트레이니(캐빈 크루 직업 훈련을 받는 사람)였다.
내가 머물던 시간은 겨우 40일이었지만, 내게 그곳은 이상하게도 진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라도 풀어내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의 날들. 나의 통총 데이즈.
회사 트레이니들 사이에서 자주 쓰이던 단어가 하나 있었다.
인스트럭터의 줄임말인 ‘인스’.
“인스 운이 크대요.”
“인스 잘못 걸리면, 장난 아니래요.”
“어떤 인스일지... 너무 걱정되지 않아요?”
트레이닝 과정에서 만나는 한 명의 인스트럭터는 트레이니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이 컸다. 그래서 트레이니가 어떤 인스트럭터를 만나게 될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트레이니들은 매 과목마다 어떤 인스트럭터를 만날지는 미리 알 수 없었다.
수많은 배치가 있는 것처럼 수많은 트레이니들이 있었고 그 트레이니들을 가르칠 인스트럭터들 역시 많았다. 트레이닝 스쿨의 규모는 그만큼 상당했다.
트레이닝의 총과정은 각각 다른 인스트럭터가 세부과목 수업을 다뤘는데 그 모든 과정 중에 가장 어렵고 종합적인 파트는 바로 Evacuation (이베큐에이션)이라는 과목이었다.
‘대피’라는 뜻의 이베큐에이션은 항공기가 비상 상황에 처했을 때 승객과 승무원이 안전하게 항공기를 빠져나오는 절차를 가리키는 말이다. ‘응급처치’나 ‘화재’, ‘난기류 상황’, ‘비상착수’, ‘불시착’ 등 그간 배웠던 모든 과목의 내용이 총체적으로 종합되어 있었다. 이 교육 과정 동안에는 실제로 비행기 모형 안에 들어가 훈련했는데, 갑자기 비상 상황이 일어나면 승무원으로서 그간 배웠던 모든 내용을 기억해 신속하고 정확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고 이를 평가받았다.
그간의 힘겨웠던 트레이닝에서 내가 그런대로 한 고비 씩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처음 만났던 따뜻한 남자 인스트럭터나 또 이어진 다른 과목의 인스트럭터들처럼 까다롭지만 최대한 트레이니가 패스하기를 바라는 강사 덕분이었다. 또한 이베큐에이션 과목 전의 개별 과목이라서 각 과목을 공부하는 부담감이 총제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말로만 듣던 이베큐에이션은 달랐다.
실제로 하늘 위에서는 어떤 위급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며, ‘대피’는 승객과 승무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절차이다. 그리고 캐빈 크루는 승객들이 빠르고 질서 있게 탈출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꼭 항공기 추락과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승객의 건강 상태에 이상이 있거나 폭행 혹은 화재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 모든 상황을 적절히 다룰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예를 들어 선반 위에서 불이 나고 갑자기 심장의 통증을 호소하는 승객이 있으면 캐빈 크루로서 즉시 취해야 하는 행동이 있었다. 따라서 이전 세부 과목의 모든 지식을 숙지하고 있는 것이 중요했다.
항공사마다 트레이닝 내용이 다르기에 엑스 크루여도 지금 회사에서 배우는 트레이닝 내용은 또 새롭게 익혀야 할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뉴비와 엑스 크루의 치명적인 차이는 비행기 내부 구조에 익숙한 지 아닌 지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베큐에이션 시간을 거치며 비로소 항공사의 인스트럭터가 일반적인 ‘인스트럭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인스트럭터가 아니라 ‘교관’이었다. 군대나 경찰 같은 공식적인 훈련 프로그램의 전문적이고 규율이 엄격한 교육을 제공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교관’.
항공사 트레이니가 되기 전 나의 직업은 요가 인스트럭터였다. 인스트럭터 역시 특정 기술이나 활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고 실습 중심의 교육을 제공하지만, 우선 항공사나 경찰, 군대와 같은 조직 유형이 다르다. 통상적인 인스트럭터는 요가처럼 특정 기술이나 취미 활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훈련의 결과가 즉각적인 생명 안전과 관련되지는 않는다. 교육자로서 전문성이 요구되지만 그 성격은 교관보다는 가벼운 훈련이다.
그러나 ‘교관’은 캐빈 크루 트레이닝처럼 체계적이고 철저한 훈련을 제공하며 교육의 목표가 명확하고 그 결과가 매우 중요하다. 교관의 훈련을 받는 훈련생들은 전술적이고 생명 안전을 위한 기술을 터득해야 하므로 교육자의 역할과 책임감이 더 무거울 수밖에 없다. 가르치는 교육 내용이 민간에서 일반적으로 두루 쓰이는지 군대나 경찰, 항공 훈련처럼 특수한 상황과 장소에서 쓰이는지 이에 덧붙여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며 규율과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트레이닝 스쿨의 인스트럭터는 권위적이고 공식적이며 무거운 교육자들을 말하는 그 단어, ‘교관’이었다.
이베큐에이션 수업이 시작되던 날 아침, 모두가 긴장감으로 숨죽여 있고 드디어 이베큐에이션 인스트럭터가 교실에 들어왔다.
내가 그녀에게 처음 받은 인상은 ‘잘못 걸렸다’에 가까운 그런 강(력)함이었다. 그 당당한 기세는 마치 콜로세움의 여전사 같았다. 여태껏 배운 과목들의 종합이자 트레이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과목인 만큼 인스트럭터 역시 가장 막중한 책임감을 가졌으니 그에 걸맞은 강사여야 하겠지만... 그래도 우리 배치의 인스트럭터는 따뜻함이나 자비를 기대하기 어려워 보였다.
수업의 진도는 그녀의 성격만큼 직선적이었다. 또 다른 어떤 강사들보다 악센트도 없고 분명하게 들리는 영어를 구사했는데 그 뚜렷하다 못해 커다란 목소리와 울림에 매번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더 공포스러웠던 건 처음부터 마치 먹잇감을 찾듯이 타깃이 될 만한 누군가를 찾는 눈빛이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다른 트레이니들의 기 까지 눌러버릴 한 두 사람을 말이다. 과목이 진행될수록 인스트럭터는 이전의 인스트럭터가 트레이니에게 남긴 누적된 기록(Record)과 코멘트까지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간의 시험들도 중요했지만 이베큐에이션 평가에서는 몇 가지 필수 요소들, 도어의 작동이나 비상 탈출시에 승무원으로서 취해야 할 행동을 올바로 숙지하고 있는지가 아주 중요했다.
그러나 문제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작은 데서 시작했다. 나는 시험 상황이 되어서야 승무원이 앉아있는 좌석; 점프싯(Jump Seat)의 벨트도 제대로 착용해 보았다. 미리 점프싯에 앉아서 여러 번 벨트를 풀었다 끼우며 승무원 좌석에 익숙해질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크루끼리 혹은 조종실과 연락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터폰의 사용 방법도 잘 익히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처럼 기본적인 이론은 옛날 옛적 수업 시간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빠르게 지나갔다. 인스트럭터는 우리 배치에 대체로 엑스 크루들이 많으니, 역시나 다 알고 있다고 여기고 기본 지식에 오랜 시간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대피 과정이 매끄럽게 진행되기 위해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들을 모르는 채 긴장감은 또 있는 대로 받아서 비행기 모형 안에 들어갔던 것이다.
비행기 모형 안에서 실습할 수 있는 시간은 배치마다 한정적이었고 모든 트레이니가 짧은 시간 시험 같은 실습을 몇 번 하면 끝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에는 핵심적인 시험 요소들에 집중했지 승무원 벨트 착용법을 익히고, 인터폰 위치와 사용법을 다시 배우지 않았다. 캐빈 크루로서의 비행기 구조가 어색했던 나는 머리로는 익혔던 모든 장비들의 실제 위치나 장소들 또한 놀랍도록 새로웠다.
이와 같은 자잘한 부분들을 놓쳤더라도, 그렇게 점프싯 벨트를 엉망으로 매고 인터폰을 위치를 헷갈렸다 하더라도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되는 것들 그리고 주어진 예시 대피 상황에서 크루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잘 해냈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첫 단추를 잘 끼우지 못한 상태로 복잡한 난관을 헤쳐 나갈 배짱과 임기응변이 부족했다.
표정에서 드러나는 심기가 너무 분명했기에 다른 어떤 인스트럭터의 얼굴보다 또렷이 기억나는 그녀의 눈빛은 이제 나를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