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총 데이즈 (Thung Chung Days) 캐빈 크루 트레이니 일기
홍콩식 명 퉁청 Thung Chung.
우리가 부르던 한국식 이름 통총.
습하고 축축하던 통총에서의 그날들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동안 나는 캐빈 크루 트레이니(캐빈 크루 직업 훈련을 받는 사람)였다.
내가 머물던 시간은 겨우 40일이었지만, 내게 그곳은 이상하게도 진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라도 풀어내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의 날들. 나의 통총 데이즈.
마크와 시험공부를 하려고 회사에서 마크가 있는 호텔로 방향을 틀었던 날,
회사에서 N호텔로 향하는 버스는 그날따라 잠정적으로 운행을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어느새 흐린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호드득 떨어지기 시작했고 버스 정류장의 후덥지근하고 습한 공기는 괜스레 초조함을 더했다. 얼른 버스가 와서 조금이라도 빨리 호텔에 가고 싶은데 그래야 하나라도 더 물어보고 시간을 아낄 수 있을 것 같은데 버스마저 이런 나의 마음을 전혀 몰라주는 것 같았다. 기다리던 시간이 25분을 넘어갔을 즈음, 나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그간 한 번도 타본 적 없던 택시를 잡았다.
그런데 택시가 호텔과 가까워졌을 즈음 그제야 현금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빨리 갈 생각에 택시비 계산을 제대로 안 하고 탔고, 난 기사 아저씨에게 너무 죄송하다면서 현금을 인출해서 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다급하게 택시에서 내렸을 때 하필이면 호텔 입구 앞에서 우리 배치 프레이븐과 쉬락을 마주쳤다. 평일 한낮의 N호텔 로비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했던 첫마디는 정말 우습게도 “오!! 프레이븐, 쉬락 안녕! 여기 제일 가까운 ATM이 어디야?”였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나는 정신없이 호텔과 연결된 쇼핑몰로 마구 뛰어갔다. 그렇게 돈을 뽑아 다시 넓은 호텔 로비를 달려와 택시 쪽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또 마침 마주한 익숙한 형체는 큰 키에 오트밀색 스웨터를 입은 우리 반 에머슨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눈앞에 있는 같은 배치 친구에게, 그리고 인덕션 교육 셋째 날 숙제를 보여주고 친절한 설명까지 해주었던 고마운 에머슨에게 인사도 안 하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등을 살짝 치면서 인사를 건넸다.
“에머슨! 안녕!”
“오 안녕 니나!? ”
“잘 있어!”
에머슨과는 만화 속 슬로모션 같은 2초간의 짧은 인사를 나눴다.
마크에게 가려고 내가 머물지 않지만 우리 배치 대부분의 친구들을 비롯해 다른 수많은 투숙객들이 머물고 있는 N호텔을 일부러 찾은 날, 그것도 그 특정한 시간에 투 브라더스를 비롯해 에머슨까지 이렇게 우리 반 친구들을 마주쳤다는 게 신기했다. 어쩌면 그것은 앞으로의 사인(Sign; 신호)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앞으로의 여정들에서 만나게 될 중요 인물들의 미리 보기 같은 것처럼.
아직 배치 친구들을 만나지 않고 먼저 배치 명단이 담긴 메일을 받았을 때, 리스트 속 이름들에 호기심이 생겼던 까닭은 순전히 이름의 복잡성 때문이었다. 세 단어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네 단어로 이루어진 이름도 있었고, 열여섯 혹은 열일곱 개쯤 되는 알파벳 글자로 이루어진 하나의 성(姓)을 보면서 대체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어느 나라에서 온 친구들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들에 비하면 내 이름은 참으로 단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리스트에서 마크의 이름이 눈에 띄었던 것도 평범한 영어 이름과 성이 다른 친구들과는 다르게 간결했고 덜 이국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미도 마찬가지였다. 에머슨이라는 이름은 비교적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영어 이름이었고 성에서 어딘가 인도인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쉽게 읽힌다는 이유로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마치 새 학년 새 학기를 맞은 것처럼 낯선 친구들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국적을 익히기까지는 실질적으로 시간이 필요했다. 인덕션 날 같은 테이블에 있었거나 내 자리와 가까이 있지 않는 한 처음에는 많은 이름들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다들 익숙한 한국식 이름이나 영어 이름이 아니라 전혀 생소한 발음의 이름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맞아... 저 애는 분명히 어제 그쪽 테이블에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이름이 뭐였더라. 또 까먹었어.’
“있잖아, 나 네 이름을 기억하고 싶어. 이름을 알려줄래?”
모든 친구들의 이름을 외울 때까지 이와 같은 레퍼토리는 끊이지 않았다.
대체로 국적별로, 여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들끼리 남자아이들은 또 남자아이들끼리 모여 있는 데다 꽉 차다 못해 터질 듯한 일정으로 머리가 자주 복잡해졌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빽빽한 오리엔테이션 와중에 빠르게 접한 이름들은 머릿속에 전혀 각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트레이닝이 들어가기 전, 인덕션 교육 셋째 날에는 특별히 해와야 하는 숙제가 하나 주어졌다.
또 인덕션이 시작하면서 온라인 교육도 동시에 시작됐는데 그 범위가 상당했다. 앞으로 트레이닝에서 다룰 모든 내용을 미리 온라인으로 공부하는 것이었는데 어찌나 생소하고 또 양까지 많은지 교육 내용을 체크하는 퀴즈를 푸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는 우선 트레이닝 시작날까지 완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온라인 교육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할 수 없이 바로 다음날까지 해야 되는 인덕션 숙제를 포기하고 온라인 교육에 시간을 쏟았다. 그 인덕션 숙제는 아주 까다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 나름대로 어려웠고 당장 한 시간이 귀중한 내게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숙제 같았다. 주말 온종일 온라인 교육을 듣느라 혼자서 씨름을 했고, 머리가 산발이 되고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어졌지만 결국 인덕션 셋째 날의 숙제는 못한 채로 회사에 가고 말았다.
매우 침울한 상태로 회사에 도착한 아침, 식당 앞에서 마크와 투 브라더스를 마주쳤다. 이때만 해도 우리 배치 누구와도 친하지 않은 상태였고 친구들과는 단지 어제와 그제 한 교실에서 이틀을 보냈을 뿐이었다. 그래도 마크는 같은 테이블에 있었기에, 대뜸 그에게 숙제를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내 인생에서 숙제를 보여 달라고 부탁한 적이 도대체 언제였는지 정말로 아득해졌지만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마크는 약간 주저하는 눈치였고 바로 옆에 있던 쉬락을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Sure.(물론이야.)” 라면서, 마치 큰 오빠 같은 넉넉한 얼굴로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때 쉬락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쉬락을 이끌고 구내식당 안쪽의 테이블로 이동했는데 맙소사, 쉬락의 글씨를 도대체 알아볼 수 없는 거였다. 게다가 한 문제당 달려있는 답안의 내용이 너무 많아서 짧은 자투리 시간 동안 베껴쓰기는 무리였다. 대체 쉬락은 이 숙제를 하려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낸 건지 대단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난 마음을 비우는 수밖에 없었다. 인덕션 교육의 마지막 날인 오늘, 부디 숙제 검사를 안 하기만을 바라며 식당을 벗어나 회사 라운지로 이동을 했고 라운지 소파에 초조하게 앉아있을 때였다. 이제 마크와 투 브라더스는 일찌감치 모닝커피와 스낵을 집어 들며 이야기를 나누기에 바빴다.
에머슨은 그때 마크와 투 브라더스 옆에 있었다. 역시 일찍 도착했고, 같은 배치 같은 인도인 친구들인 마크와 프레이븐, 쉬락 그리고 나와 함께 라운지까지 온 것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나와 한 호텔 심지어 같은 층에 있지만 다른 배치가 되고 만 벤자민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배치가 밀리게 된 상황을 말하면서 나의 배치에 누가 있는지를 이야기했을 때 벤자민은 에머슨을 언급했었다. “에머슨은 나랑 같이 일했고, 내 밑에 있었어. 똑똑한 친구야. 에머슨에게 물어봐. 에머슨이 잘 안 가르쳐주면 내가 혼내줄게.” 그렇게 인덕션 셋째 날 아침까지만 해도 난 우리 배치 에머슨의 존재를 거의 모르고(잊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에머슨은 많은 인도인들 사이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어 했다. 쉬락의 숙제를 베끼기에는 도저히 무리지만 숙제를 아예 안 해가면 안 될 것 같아 에머슨에게 물어봤다.
“에머슨, 너 혹시 숙제했어?” “나 숙제가 너무 어렵고 복잡해서 전혀 손대지를 못 했어.. 좀 보여줄 수 있니?”
“Yes...(물론...) 뭐가 어려웠어?”
어느새 마크와 투 브라더스가 라운지를 떠났을 때도 에머슨은 떠나지 않고 내 옆에 앉아 아주 차분하게 진지한 설명을 해주었다. 훗날 내가 마크의 방에 찾아갔을 때 마크에게 듣기 바랐던 방식의 설명을 말이다. 다른 사족 없이 나의 이해를 위한 간결한 설명의 향연이 이어졌다. 놀라웠던 건, 그 존재도 잊을 만큼 조용히 있었던, 늘 졸려 보였던 에머슨이라는 아이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아이였는지 그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는 것이다. 나는 에머슨의 설명을 들으며 동시에 손이 불이 나게 한 줄이라도 답변을 베껴 적었고 급한 불이라도 끈 기분으로 인덕션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트레이닝 스쿨에서의 첫날 교실에 들어갔을 때, 내심 에머슨처럼 잘 알려주는 친구와 앉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에머슨 보다 일찍 도착한 건, 그리고 내게 같이 앉아도 되냐고 물어본 건 에머슨이 아니라 마크였다. 게다가 에미는 나와 멀찌감치 떨어진 분단에 앉았고 트레이닝 초창기에 나는 금세 그의 존재를 잊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트레이닝이 힘겨워질수록 내게는 원리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또 심리적인 여유가 있는 같은 반 친구가 필요했다. 그리고 내 짝꿍 마크는 더 이상 그 역할을 해줄 수 없다는 게 분명했다. 이때만 해도 인도인 여자친구들과는 그리 가깝지 않았고 따로 교류하는 상태도 아니었다. 또 함께 점심 식사를 했던 홍콩 로컬 친구들은 타국 트레이니들처럼 회사 근처의 호텔에 머무는 게 아니었고 홍콩 어딘가의 자택에서 출퇴근을 했기에 따로 만날 시간적인 여유가 부족했다.
그 어느 날 저녁이었다. 불현듯 나는 인덕션 셋째 날 아침의 에머슨이 떠올랐다.
언제든 물어보라고 했던 누구보다 잘 설명해 주었던 에머슨. 나는 핸드폰 메신저를 열었다.
[에머슨 안녕? 나 니나야. 나 모르는 게 있는데 좀 물어봐도 돼?]
[Yes... 물론이야. 모르는 게 있으면 다 물어봐.]
[혹시 지금 전화해도 되니?]
전화가 걸리자 난 포스트잇에 적어 놓은 질문 리스트를 하나씩 물어보았고 에머슨은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게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주었다. 통화는 자정이 넘어서 끝났다. 에머슨의 답변은 항상 1등을 놓치지 않는 똑똑한 반장이 해주는 설명 같았다. 그 한 시간이 어찌나 임팩트 있고 간결했는지 모른다. 이전에 벤자민이 해주었던 말대로 난 에머슨에게 더 물어봤어야 했다. 일찍 도움을 청하지 않은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나 이제 다 이해했어. 오늘 너무 피곤할 텐데.. 덕분에 고마워.”
“괜찮아. 별 것 아니야. 잘 자고, 내일 보자!”
그리고 이제 ‘이베큐에이션’이 시작되어 스스로가 비상 상황에 처해 대피가 필요해진 초저녁이었다. 나는 기꺼이 시간을 내줄 수 있고 나를 가르쳐줄 수 있는 친구이자 선생님의 존재가 간절했다. 인스트럭터 역시 같은 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난 에머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 에머슨. 혹시 나 이따가 너한테 물어보러 가도 되니?]
[Yes... you can...]
지나고 보니 에머슨의 무엇보다도 훌륭한 점은 바로 이 점이었다. 그는 요청을 받으면 대개 긍정적인 답변을 한다는 것이었다. 실은 자신도 귀찮고 피곤했을 텐데 웬만해서는 'No'를 표현하지 않는 점이 뭐랄까, 어른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날 저녁 피곤함도 잊은 채 책을 들고 다시 N호텔로 향했다. N호텔 어느 층 복도 끝에 있는 에머슨의 방에 다다라 초인종을 눌렀다. 그건 N호텔로의 세 번째 방문이었다. 마크의 방, 다 함께 모였던 날의 프레이븐의 방 그리고 이제 에머슨의 방.
방문이 열리자 회사에서는 늘 졸려 보이기만 했던 에머슨이 사라지고 또 새로운 모습의 사람이 서 있었다.
에미의 방은 마크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