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총 데이즈 (Thung Chung Days) 캐빈 크루 트레이니 일기
홍콩식 명 퉁청 Thung Chung.
우리가 부르던 한국식 이름 통총.
습하고 축축하던 통총에서의 그날들을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동안 나는 캐빈 크루 트레이니(캐빈 크루 직업 훈련을 받는 사람)였다.
내가 머물던 시간은 겨우 40일이었지만, 내게 그곳은 이상하게도 진하게 남아 있다.
이렇게라도 풀어내지 않는다면 내 마음이 시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의 날들. 나의 통총 데이즈.
트레이니가 되어 장기간 투숙할 호텔 방을 배정받고, 짐을 얼추 정리한 며칠 뒤 어느 정도 마음에 여유가 생겼을 즈음 근처 쇼핑몰 지하의 슈퍼마켓에 가곤 했다. 필요한 먹거리나 생필품을 사야 했고 홍콩의 마트는 어떠한 지를 알아보는 일 역시 아주 즐거웠기 때문이다.
전철과 버스가 모두 지나다니는 통총역에 바로 붙어 있는 커다란 아웃렛만큼이나 지하의 슈퍼마켓은 큰 규모였다. 온갖 먹거리와 조리된 식사, 일본산 잡화나 심지어 한국 식재료까지 웬만한 물건들이 다 있었다. 마치 한 층으로 함축되어 있는 이마트 같았다. 물론 가격은 조금 더 비쌌다.
슈퍼마켓에 처음 갔을 때는 시간을 쪼개 필요한 것 만을 찾아 사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여러 번 와서 익숙해진 다음에는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물품 등을 살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면 심심치 않게 회사의 유니폼을 입은 마치 갓 퇴근한 듯한 모습의 승무원이 보였다.
‘저 사람은 트레이닝을 마치고 비행을 하기 시작한 승무원일까. 왠지 한국 사람 같은데.’ 하고 생각할 때가 더러 있었다.
익숙한 슈퍼마켓 안에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사람을 보게 되면 호텔 로비나 회사에서 자주 보는 이들 보다 더 큰 동경의 마음이 일었다.
혼자서 장을 보는 행위는 나와 별다를 바 없는데, 저 사람은 내가 시달리고 있는 트레이닝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유니폼을 입고 있다는 게 결정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내게 외국 항공사의 승무원이 된다는 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외에도 하루, 하루 장을 보는 일처럼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 역시 자신이 기꺼이 살아가기로 선택한 타국에서 스스로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새롭고도 익숙해질 수 있는 미지의 세상을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한다는 데 더 큰 좌절감을 느꼈던 이유였다.
영화 ‘금지옥엽’의 히로인 자영은 9000:1의 경쟁을 뚫고 신인가수로 발탁되어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이 180도 바뀌었지만, 영화는 신인가수가 된 자영의 삶 이전의 평범한 자영 역시 소소하고 풍부하게 다룬다.
자영은 바퀴벌레가 보이는 집에 살아도 크게 낙담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주어진 것을 불평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늘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강조된 것은 좋아하는 것에 있어서의 남다른 열정이었다. 순수하게 인기가수 ‘로즈’와 그녀의 파트너인 ‘샘’을 동경하는 마음은 여자인 그녀가 남장을 하여 신인가수 오디션을 보러 가게 만드므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있어서 만큼은 모든 것을 줄줄이 꿰고 있을 정도의 뜨거운 열정과 온갖 시련에도 좀처럼 굴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오디션장에서도 쿨쿨 잠들어버리는 느긋함은 내가 자영에게서 닮고 싶은 것이다.
통총에 머무는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트레이닝이 막바지로 치닫은 시기에는 심심하면 화장실을 들락날락했고 불안하고 경직된 마음은 쉽게 편안하지 못했다. 단지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 만으로 말이다.
한국에 돌아와 홍콩에 남다른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금지옥엽’을 다시 보면서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다른 무엇보다 자영의 느긋한 성격과 좌절을 마주했을 때의 태도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희망의 정면돌파였으니까.
자영은 달려간다.
사랑하는 ‘샘’을 만나 자신이 여자이고,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위해 부끄러움이나 체면 같은 건 저 멀리 내려놓고 뛰어간다. 가는 길이 멀고 덥거나 차에 타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너무 힘에 부치면 잠시 쉬었다가 곧 자영다운 기막힌 상상을 한다. 자전거를 탄 모습을 흉내 내면서 다시 힘을 내 달려간다. 귀엽거나 웃기기보다는 정말로 본받고 싶은 태도였다.
그리고 그때 맞이한 결론은, 역시나 자신을 너무나 그리워하던 샘을 만난 것이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달려온 자영을 보고 샘은 자영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자영은 그 자리에서 샘이 사랑하는 사람 역시 그녀라는 기적 같은 말을 듣는다.
처음 낙동강 오리알 같은 처지가 되었을 때를 떠올리면 꼬여버린 일정에 당혹스러워했던 내가 있었다. 하지만 이 덕분에 보다 자유롭고 느슨하게 홀로 주변을 배회할 수 있었고, 그렇게 홍콩이란 곳이 아주 천천히 내 마음속에 들어왔다.
또 삭막한 학습 환경과 유난히 무서운 인스트럭터를 만나 진정으로 커다란 위기를 느끼지 않았다면.. 과연 그렇게까지 맨땅에 헤딩하듯 달려들었을까? 바쁜 것이 뻔한 국적도 다른 친구의 방에 선뜻 찾아가 문을 두들길 용기까지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얻은 건 도움이나 궁금점 해소와 같은 단순한 목적을 넘어선 다른 세계와 사람에 대한 친밀함이었다.
그리고 쓰디쓴 실패를 통한 동기 부여는 마치 불도저처럼 강력했다. 운을 떠나서 언제, 어디서든 반드시 실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
삶은 영화처럼 빠른 속도로 당장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더디 걸린다 해도 진심을 잃지 않고 뜨거운 열정을 간직한 채 묵묵히 달려가다 보면 언젠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의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