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발 집에선 신발 좀 벗어주겠니

미국인 남자친구와의 신발논쟁 그리고..

by 아틀란티스 소녀

이렇게 자주 싸우는 연애는 또 오랜만인 것 같다.

웬만한 싸움의 원인들은 거의 다 경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오만했다는 걸 깨닫는 건 시간문제다.

사실, 이게 단순한 싸움인지, 아니면 두 개의 거대한 세계관이 충돌하는 건지 가끔 구분이 애매할 때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부딪혔던 건 그의 자유분방한 겉모습 때문이었다.

나는 다 큰 남자가 수염을 제 때 깎지 않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미국 남자들은 왜 그렇게 수염에 집착하는지..

내 남자친구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구레나룻까지 길렀다. 그는 모든 털을 밀면 너무 아기 같아 보이고,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어서 싫다고 했다.


또한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언제나 머리가 길었을 때라며, 여성의 중단발 정도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해서 머리를 자르라고 잔소리를 했고 그래도 그가 끄떡도 하지 않자 결국 친구까지 동원해서 "여자친구가 그렇게 원한다는데 한 번쯤 맞춰줄 수 있는 거 아니냐?"는 말에 남자친구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그러나 이발소에는 절대 가지 않고 내가 직접 잘라준다는 전제 하였다.

나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와 약속했던 ‘D-day’, 나는 그의 집에 한시의 오차 없이 나타났고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내가 여기까지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나는 이발기를 한 번도 다뤄본 적 없었던 사람이었지만,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샘솟았는지, 망설임 없이 기계를 작동시켰다.


치렁치렁하던 머리가 바닥에 후드득 떨어지는 걸 보며, 나는 속이 다 시원했다.

반면 남자친구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내가 실수로 한쪽을 삐뚤게 자르자, 그는 결국 폭발했다. 망한 그의 머리는 결국 더 짧게 잘라내야 했고 이태원에서 언뜻 본 것과 같은 그런 군기 잔뜩 잡힌 미국군인 '신병'의 모습이 되었다. 그는 정말 절망했고, 나는 속으로 그게 백번 더 나은 모습이라고 몰래 생각했다.


그는 내게 "너는 한국에서, 그리고 미디어에서 익숙해진 '남성의 모습'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어."라고 말했다. 정말일까?


내가 생각하는 ‘깔끔한 남성의 모습’, ‘남자다운 모습’은 결국 사회가 만들어놓은 틀일 뿐이었을까?

나는 긴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이 지저분해 보였고, 그 모습이 싫은데 그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사회적 규범의 일부였을까?

그리고 나는 사람을 과연 있는 그대로,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기준을 벗어난 모습까지도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신발논쟁’이었다.


내 아파트에 올 때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신발을 벗었다. 하지만 그의 집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이전까지 아시안 룸메이트와 함께 살면서 신발을 벗고 생활했지만, 최근 독립하고 본인의 집을 갖게 된 후에 상황은 달라졌다. 원래 그랬던 양, 굳이 신발을 벗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내 눈치를 보며 새로운 해결책을 제안했다. 아마존에서 파는 'Ultraviolet Shoe Sanitizer'라는 제품을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신발을 넣으면 병균을 제거해 준다고 하면서, 이것이 우리 둘이 원하는 것의 중간 지점(middle ground)이라고 말했다. 나는 얼토당토 하지도 않은 이야기에 챗GPT까지 동원해 가며 곧바로 반박했다. 그는 내게 먼지랑 모래가 병균을 낳는다는 건 근거 없는 강박이라고 하며 우린 또 끝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이 제품이 과연 우리의 신발논쟁의 타협점이 될 수 있을까? (흠)





우리의 싸움은 자주 ‘휴전’ 상태로 끝나곤 한다.

실제적으로 한 시간씩 열과 성을 다해 서로를 반박하고 설전을 벌이다 보면, 둘 다 제 풀에 지쳤는지 처음보다 진정이 되기는 한다. 그리고 그렇게 치열하게 맞붙은 날에도, 그는 여전히 씩씩거리며 돌아서며 "집에 가기 전에 한 번 안아도 돼?"라고 묻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는 잘 자라고 말하며 꼭 키스 쪽 이모지를 보내온다.


이상한 일이다. 우린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면서 어떻게 아직 함께인 건지?


나는 여전히 그의 긴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이 싫고, 그가 여전히 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움찔거리며 신발을 한 템포 늦게 벗는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


상대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난 사랑에 아직 다 닿지 못한 것 같다.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서로 충돌하고, 때로는 끝없는 논쟁 속에서 지쳐버리는 와중에도 결국, 우리는 또다시 서로를 마주 본다. 끝없는 논쟁 속에서도 상대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본질이 ‘완전한 합의’가 아니라 ‘계속해서 함께하려는 의지’라고 정의해 봐도 괜찮다면

—우리는 아마, 여전히 함께일 것이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4화미국인 시어머니 간접 경험 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