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연애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들은 조언이 있었다.
"조심해. 너는 사귄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상대는 아닐 수도 있어."
즉, 함께 시간을 보내고 연인 같은 행동을 하지만, 상대방이 진지한 관계로 받아들이는지는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조롱하는 말로 'Situationship'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을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남자친구와 관계가 깊어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 참지 않고 바로 물어봤다.
" Are we exclusive?" (우리 사귀고 있는 거 맞는 거지?)
그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Yes, of course." (당연하지.)
그랬던 그가, 왜 “I love you”라고 말해주지 않는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매일 나를 보고 싶어 하고, 늘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면서도.왜.
결국, 내가 먼저 참지 못하고 연애를 시작한 지 몇 주 만에 I love you라고 말해버렸다.
그는 그저 'Love you, too'라고 답했는데, 미국에서는 'I love you'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것과 'Love you, too'라고 가볍게 대답하는 것의 뉘앙스 차이(후자는 친구 사이에서도 흔히 쓰는 표현)가 크다는 것을 미국인 친구에게 들은 적이 있던 터라, 그의 반응은 날 무척 서운하게 했다. 그는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이때 일을 회상하면서 당시 본인은 완전히 당황했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그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훨씬 더 신중하게 쓰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연애를 시작하면 비교적 자연스럽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분위기다.
나 또한 그랬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툭툭 내뱉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특히 나의 남자친구처럼 한 사람과 친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에게 “I love you"는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니다.
그들에게 이 말은 단순한 감정보다 훨씬 깊고, 장기적인 헌신을 의미한다.
즉,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으면 되돌릴 수 없는 말,
관계를 한 단계 더 심화시키는 중요한 신호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쉽게 말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확신이 들 때까지는 절대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첫 기념일, 그는 카드에 이렇게 적었다.
"I jest that you're a princess, but I do intend to love you, and protect you accordingly."
(나는 네가 공주라고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사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보호할 생각이야.)
중세시대의 칼을 취미로 모으고, 갑옷을 입는 것을 열광하는 그에게 이 말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로맨틱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두 번째 기념일의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Two years in, and I feel like we've only just begun to scratch the potential of love between us."
(2년이 지났지만, 난 이제야 우리 사이의 사랑이 줄 수 있는 그 크기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 것 같아.)
우리는 여전히 “Goodnight, I love you” (잘 자, 사랑해) 같은 인사를 주고받지는 않는다.
내 발을 꾹꾹 눌러 마사지해주는 것,
본인 집에 놀러 왔을 때 내가 먹을 수 있도록 햇반 한 박스와 김 세트를 준비해 두는 것,
Billie Eilish의 'Birds of a feather'을 듣고 닭똥같은 눈물을 훔치면서 이 노래는 나를 떠오르게 한다고 말하는 것.
오히려 말보다 더 강렬하게, 행동으로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나는 더 이상 ‘사랑해’라는 말에 집착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건 꼭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되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