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해본 적이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남자친구의 부모님이란 존재는 국적과 문화를 떠나 언제나 부담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몇 해 전, 남자친구가 형제들이 다 모이는데 나도 꼭 같이 왔으면 한다고 했을 때 난 '올 것이 왔구나' 했다. 남자친구와 나는 시내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외곽에 위치한, 그가 자란 집으로 향했다. 미드에서만 보던 마당 딸린 크고 아름다운 주택에 도착했을 때, 내 긴장은 극에 달했다.
집 안 곳곳에는 어머님의 깔끔하면서도 촌스럽지 않은 감각이 녹아 있었다. 작은 소품 하나하나에도 신경 쓴 흔적이 보였고, 집 전체가 따뜻하고 정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집에는 나이 들었지만 관리가 잘되어 보이는 골든 리트리버가 신나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고, 햇볕이 쨍쨍하게 들어오는 통창으로 둘러싸인 마루 너머로는 수영장이 보였다.
그들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처음엔 '나에게 궁금한 것이 없나?' 라는 생각도 했다. 나는 으레 남자 친구의 부모님을 떠올리면, 자기소개를 하고 신상을 공개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먼저 들었다. 물론 그런 자리라면 그냥 당당하게 이야기하면 될 일이지만, 스스로 도마 위에 올라 평가받고 싶지는 않다는 부담감도 느꼈었다. 나는 나름대로 당당한 편이지만, 동시에 남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남자친구의 집에 갔을 때, 그런 부담스러운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질문 공세를 받는 대신, 나는 그들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고, 그 속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했다. 그런 점이 나에게는 꽤 편안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들은 나를 굉장히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었고 천천히 내가 마음을 열고 다가오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그날 어머님이 고급스러운 접시에 정성스럽게 플레이팅 한 점심을 차려주셨는데, 남자친구의 형제들은 평소같았으면 플라스틱 접시와 포크를 썼을거라는 농담섞인 얘기를 했고 이 말을 들으신 어머니는 수줍게 웃으셨다. 식사 후, 나는 어머님께 뭐라도 돕겠다고 했지만, 손님이니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맞는 말이긴 했다. 결국 나는 소파에 기대 누워 있다가, 남자친구가 어릴 때 쓰던 방에 들어 가서 1시간이 훌쩍 넘게 낮잠을 푹 자고 나왔다.
그 이후 몇 번 더 그들의 집을 방문했고, 어머님은 그때마다 항상 맛있는 요리를 준비해 주셨다. 나는 특별히 음식을 가리는 편이 아니었지만, 지역적 특색이 강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어머님은 나의 작은 것들을 바로 외우셨다. 내 생일, 우리 엄마와 아빠의 나이, 우리 기념일 같은 사소한 디테일들을 메모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조용히 기억하고 계셨다.
어머님이 내 생일과 가족의 소소한 정보들을 기억해 주셨을 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신경 써 준비해 주셨을 때, 그리고 부담스럽지 않은 관심으로 내 일상을 지켜봐 주셨을 때, 나는 생각보다 깊이 그 따뜻함에 스며들고 있었다. 식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진 예쁜 접시처럼, 내 존재도 그들 사이에서 소중하게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인스타그램에 자주 올리는 편인데, 어느 날 친구 요청이 남자친구의 부모님으로부터 왔다. 보통은 가족 친구나 어른들의 요청은 부담스러워 피하는데,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 후로도 내가 올리는 스토리에 가끔 DM을 보내셨는데, “와, 재밌겠다~” 같은 짧고 편안한 반응들이었다. 그마저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내년에 초등학교 교사로 30년을 채우고 은퇴를 앞두신 어머님은, 언젠가 와인 한 병을 비울 즈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집 형제들 중 누구라도 아이를 낳으면, 내가 풀타임으로 돌봐주고 싶어.” 맨 정신으로는 절대 안 하셨을 그런 말씀이지만 그 말 때문에 아주 혹시라도, 만약에라도 그분들이 나의 시부모님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은 해봤다. 단순한 상상이지만 또 자연스럽게 스며든 감정이었다.
어떻게 놓고 보아도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그런 '남의 부모님' 이겠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조금씩 쌓여갈수록 무언가 조금씩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것이 느껴진다. 그간 남자친구는 숱하게 사귀었어도 이렇게 남자 친구 부모님을 자주, 그리고 다양한 이유들로 만난 적이 있던가. 어쩌면 이건 문화의 차이.
아직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관계는 부담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정겹고 조금씩 익숙해지는 중이라는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