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공간

by 고다혜

라면 스프가 마법의 가루라면 마당은 마법의 공간이다. 어느 음식이든 라면 가루를 넣으면 음식 맛이 살아나듯 뭐든 마당에서 먹으면 맛있다.


묵은 반찬을 해결하는 날. 냉장고에 있는 반찬통을 한데 모았다. 양푼에 밥을 넣고 시금치나물, 멸치볶음, 무나물을 넣었다. 메뉴는 비빔밥이었다.


"방앗간에서 짜 온 거야."


이 비빔밥의 히든카드는 들기름. 동네 언니가 직접 키운 들깨로 며칠 전 방앗간에서 짜다 주신 들기름이었다. 기름이 싱싱할 수도 있다는 건 언니 덕분에 처음 알았다. 계곡물처럼 투명하고 유채꽃 같은 노란빛이었다. 갓 짠 들기름은 고소할 뿐만 아니라 산뜻하고 싱그러웠다. 여기에 고추장을 넣는다는 건 들기름에 대한 모독이다. 반찬 위에 기름 쪼르륵 붓고 뚜껑에 묻은 한 방울도 아까워서 손가락으로 싹싹 훑어 먹었다. 5일장에서 산 양은 밥상에 양푼을 얹었다. 김장 김치도 썰어서 올렸다. 묵은지처럼 노르스름~한 빛깔에 윤기가 도는 게 보기만 해도 침이 고였다. 상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돗자리 위에 앉으니 소풍 온 기분이었다.


"맛있게 드세요~맛있게 드세요~!"


남편과 나. 식구는 둘뿐이지만 식사 인사는 늘 거하다. 포클레인 삽으로 흙을 가득 뜨듯 수저로 비빔밥을 잔뜩 떴다. 배가 너무 고팠다. 입안에 넣고 꼭꼭 씹었다. 며칠째 먹어 물렸던 반찬인데 신기하게도 맛있었다. 양푼에 산처럼 쌓여있던 밥이 숟가락질 몇 번 했더니 금세 사라졌다. 들기름 덕분이다. 언니 덕분이다. 마당 덕분이다.



우리만의 촌브런치도 있다. 쪽파전과 막걸리다. 이 파전에는 쪽파와 부침가루 외엔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는다. 오징어, 홍합 등의 해물이라던가, 양파 당근 같은 다른 채소를 전혀 넣지 않는다. 동네 토박이 선배님들께 배운 레시피다. 밭에서 막 뽑은 파가 그 모든 맛을 다 책임진다. 혼자서도 당당하게 단맛, 감칠맛을 감당하고 풍미 좋은 파향을 뽐낸다. 흰 부분은 적당히 아삭하고 초록색 부분은 식감이 부드럽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쪽파가 자기소개하는 맛이다. "안녕하세요 파전이에요." 밭에서 막 뽑은 쪽파 맛을 온전히 볼 수 있는 파전이다. 막걸리가 술술 들어갔다. 하얀 구름이 있으니 하늘이 더 파랗게 보인다. 적당히 알딸딸~ 하니 마당에 잡초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휴일이었다.



포근한 날엔 세수도 하지 않고 마당으로 나왔다. 각자 커피 한 잔, 책 한 권 들고서. 우리가 집에서 나가는 순간, 마당에서 아침 햇살을 받고 뒹굴거리던 고양이들이 와다다 흩어졌다. 나무 밑 그늘로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가만히 책에 집중하다 보니 가슴팍이 통통하고 늙은 호박색을 한 새가 어느새 나무 꼭대기에 와 앉아있었다. 그리고 잔디에 몸을 바짝 엎드린 고양이 한 마리가 그 새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 느슨한 긴장감이 귀여워 한참을 바라보다가 커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시선을 책으로 돌렸다. 쌉싸름한 커피도 맛있고 눈으로 읽는 글자도 맛있었다.


뭐든 마당에서 먹으면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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