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김치호> 만선을 위하여!
우리집 김장은 8월에 배추와 무를 심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심는 것부터 담그는 것까지 3개월이 걸리는 장기 프로젝트다.
키운다. 적당한 비와 바람이, 따사로운 햇볕이 필요하다. 자연에게 잘 부탁한다고 빈다. 그 사이 내가 할 일은 달팽이와 벌레를 잡는 것. 배추는 나만 맛있는 게 아니다. 배추벌레는 벌써 잎을 얼마나 뜯어 먹었는지 몸통이 초록색 핫도그처럼 통통했다. 녀석들을 그대로 뒀다간 우리가 먹을 배추가 남지 않을 거다. 밭을 부지런히 돌보며 달팽이, 벌레를 매의 눈으로 골라냈다. 배추가 잘 자라지 않으면 중간중간 비료도 줬다. 김장 때까지 병들지 않게 적당히 약도 쳤다. 벌레 잡고, 비료 주고, 약 치는 과정을 배추 상태를 보면서 3개월간 반복했다. 한 존재를 키운다는 건 이렇게나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다. 농사짓기 전엔 몰랐다.
11월 말. 금이야 옥이야 키운 배추를 수확했다.
매년 평균 40포기 정도는 심었다. 우리 식구는 둘뿐이지만 엄마, 시댁, 친구, 주변과 나눠 먹으려면 그 정도는 필요했다. 농사가 잘 된 해엔 심은 대로 다 수확하지만 그렇지 못할 땐 반 밖에 거두지 못할 때도 있었다. 어느 쪽이라도 감사했다. 많으면 많아서 좋고 적으면 적은 대로 아껴 먹으며 소중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
무 이파리를 머리채 잡듯 야무지게 잡고 땅에서 쑤욱 뽑았다.
장갑으로 싹싹 닦아 칼로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하고 달았다. 과즙 같은 단물이 입안에 가득 찼다. 한 입이 두 입이 되고 세 입이 됐다. 배추는 한쪽으로 젖혀 밑동을 칼로 잘랐다.
밭에서 가져온 수확물을 집 앞에 가지런히 가져다 뒀다. 전시해놓은 작품처럼 쌓여있는 배추를 보니 가슴이 웅장해졌다. “이 정도 농사지었으면 우리 꽤 괜찮은 농부 아냐?” 우쭐해하며 자신감을 충전했다.
드디어 1박 2일의 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김장이 힘든 진짜 이유는 '배추 절이기' 때문이었다. 소금물에 절이고, 뒤집고, 씻고, 물 빼는 데만 12시간이 걸렸다. 물에 젖은 옷처럼 무거운 절여진 배추를 씻는다고 들었다 놨다 반복하다 보면 눈앞이 배춧잎처럼 노래졌다. 이 상황을 네 글자로 말하자면? 사. 서. 고. 생.
찹쌀 풀을 쑤고 파뿌리, 양파, 배, 북어 대가리를 넣고 육수를 만들었다. 김장 특가로 사 온 북어 대가리를 스탠볼에 넣고 씻으려는데 자꾸 북어와 눈이 마주쳤다. ‘으악ㅜㅜ…’ 어두일미. 생선은 왜 머리가 맛있는 걸까. 씻는 사람도 괴롭고 씻기는 북어도 괴롭게… 한쪽에선 남편이 지문이 닳도록 무를 채 썰고 있었다. 채 썰다가 남은 무는 배추를 통에 넣을 때 사이사이에 껴주면 시원한 섞박지가 될 것이다. 갓, 쪽파 등 나머지 재료들까지 준비하고 첫째 날을 마무리했다.
둘째 날 아침. 준비한 재료들과 양념을 마당으로 가지고 나갔다. 앞치마를 야무지게 동여맸다. 밤새 배추가 잘 있었는지 확인했다. 딱 좋게 절여져 고무신처럼 부드럽게 구부러졌다. 큰 통에 채 썬 무, 홍갓, 청갓, 쪽파를 넣었다. 먼저 고춧가루를 넣고 색깔이 잘 배게 버무렸다. 내가 ‘농사 박사님’이라고 부르는 옆 동네 삼촌에게 산 고춧가루다. 태양빛을 받은 것처럼 밝게 빛나는 빨간색이 참 곱다. 그다음 육수, 생강즙, 다진마늘, 멸치액젓, 새우젓, 생새우, 매실청을 넣고 잘 섞는다. 벌써 매콤하고 간간한 맛있는 냄새가 난다. 배춧잎 한 장 찢어 김치속 조금 얹어 간을 본다.
“오빠, 어때?”
“싱거워.”
액젓 적당히 새우젓 조금 더 넣는다. 내 입엔 단 맛도 부족했으니 매실청도 더.
“지금은?”
“계속 싱거운 것 같은데~”
“응~ 난 딱 좋아.”
“왜 물어봤어?”
“그냥.”
<배추김치호> 선장은 나다.
“내가 요리는 못해도 간 보는 데는 귀신이잖아~. 선장을 믿고 선원이여 따르라~!”
김치속을 쥐고 배춧잎을 한 장 한 장 펼치며 꼼꼼하게 발라준다.
속을 많이 넣으면 김치가 텁텁하다. 쥐고 있는 양념을 잎마다 적당히 배분하는 게 중요하다. 작년, 재작년 김장 에피소드를 얘기하며 일하다 보니 탑처럼 쌓여있던 배추가 어느새 몇 개 남지 않았다. 곧 끝난단 생각에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인다. 통에 김치를 차곡차곡 담고 초록색 겉잎을 제일 위층에 이불처럼 덮은 후에 꾹 누른다. 김치가 쌓일수록 뿌듯함도 쌓인다. 김치통에 받을 분들 이름을 적고 1박 2일 김장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센스 있는 선장은 쫄깃한 수육을 삶고 막걸리까지 준비했다. 막걸리 한 잔 마신 후, 절인 배춧잎에 수육 얹고 김치속 올려 한 입 크게 먹는다. ‘캬…끝내준다!’ 만선이 따로 있나. 맛있고, 보람 있고, 마음이 행복으로 꽉 차면 그게 만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