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박사는 아무나 되나요~
“고추 농사 잘 지으면 농사 박사여~”
그만큼 고추 농사가 손이 많이 가고 까다롭다고 마을 어르신이 하신 말씀이었다. 다른 박사는 어려워도 고추 박사에는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덧 텃밭 농사 6년 차. 키워본 작물 가짓수 10종류. 나 정도면 농사 석사쯤은 될 것 같았다. ‘좋았어~해보자!’ 올해 김장엔 우리가 직접 농사지어 만든 고춧가루를 넣는다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했다. 고춧가루 나눠줄 사람들을 헤아려보니 10명이 넘었다. 다들 받으면 얼마나 좋아할까. 비싸고 귀하다는 국산 고춧가루. 심지어 지인이 정성껏 농사 지은 국산 고춧가루!
고추 모종을 사러 동네 농약방에 갔다. 모종 120개를 사고 밭에 앉아서 일할 때 쓸 엉덩이 의자도 샀다. 물론 우리집 창고엔 빨간 체크무늬, 잔잔한 꽃무늬 의자가 이미 있었다. 하지만 처음 지어보는 고추 농사인 만큼 새 의자에 앉아 산뜻한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새 학기를 맞아 새 학용품을 준비하는 학생처럼.
거름 되라고 흙에 계분을 섞고 물 잘 빠지게 둔덕을 만들었다. 잡초 나는 걸 예방하기 위해서 검은 비닐을 씌웠다. 집에서 밥을 먹고 온 사이 밤이 됐다. 너무 어두워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밭 쪽으로 켜놓고 고추 모종을 심었다. ‘깜깜한 데서 저 사람들 뭐 하는 거야?’ 지나가는 사람이 수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남의 땅에 도둑 농사를 짓는 것 같았다. 그래도 끝까지 꼼꼼하게 심었다. “아무도 죽지 말고 잘 뿌리내리렴~!”
그동안 내가 해왔던 농사대로라면 이제 자라기를 기다렸다가 수확만 하면 됐다. 상추는 심고 따면 끝. 고구마는 심고 캐면 끝. 하지만 고추 농사는 이때부터가 진짜였다. 끝도 없는 노동의 도돌이표가 시작됐다. 고추가 키가 크면 쓰러지기 때문에 지지대를 댔다. 자라는 속도에 맞춰 매번 지지대에 줄로 고정했다. 열매 맺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곁 순은 그때그때 땄다. 잡초는 또 얼마나 잘 자라는지 뽑고 돌아서면 자라있고 뽑고 돌아서면 자라있는 것 같았다. 고추가 잘 클 수 있게 제때 맞춰 비료도 줬다. 약을 치는 것도 고된 일이었다. 고추는 병해충에 약하다. 대표적으로 ‘탄저병’이라는 게 있다. 일부만 감염돼도 빗물을 타고 순식간에 밭 전체로 퍼져 고추를 다 썩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병이다. 균이 침투했을 때는 이미 늦기 때문에 예방이 제일 중요하다. 비가 오기 전에 약을 치고, 비가 내린 후에 약을 치고, 비가 내리지 않을 때 적당히 약을 쳤다. ‘우와… 이 정도는 돼야 농사 좀 지었다고 할 수 있구나. 지금까지 내가 했던 상추 농사는 소꿉놀이였구나…’
7월. 고추 모종이 크게 잘 자랐다. 줄기가 굵직했다. 나무마다 주렁주렁 달린 고추가 밭을 가득 메웠다. 이걸 우리가 키운거라니! 그간의 모든 고생이 상쇄되는 순간이었다. 초록색 고추가 오묘한 색깔 옷을 몇 번 갈아입더니 새빨갛게 변했다. 마침내 딸 때가 된 것이다.
서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의 한 가운데. 해가 째려보는 것 같은 따가운 뙤약볕 아래 쪼그려 앉아 고추를 땄다. 땀이 비처럼 쏟아졌다. 무릎이 뽑히는 것처럼 아팠다. 농사가 잘 돼도 너무 잘 됐다. 수확해야 할 고추가 산더미 같았다. ‘아이고… 나머지는 일어나서 따야지.’ 서서 몸을 계속 숙인 채로 일을 하려니 이번엔 허리가 부러질 것처럼 쑤셨다. 매운 근육통에 시달리면서 익는 순서에 맞춰 고추를 총 여섯 번 수확했다. 하나하나 손으로 따는 게 너무 힘들어서 농사 끝 무렵엔 빨갛게 물들어 가는 고추가 반갑지 않았다.
고춧가루를 만들려면 수확한 고추를 말려야 했다. 이웃분들이 ‘와서 우리집 고추 건조기 써~.’라고 해주셨지만 “저 태양초 만들어 보려고요!”라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런데 농사 선배님들이 고추 건조기 쓰실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첫 번째 딴 고추는 햇볕에 말리면서 태양초를 만들어 보려 하다가 곰팡이가 피었다. 태양 아래에서 말린다고 쉽게 태양초가 되는 게 아니었다. 두 번째부터는 이웃분들의 도움을 받아 건조기에서 고추를 말렸다. 수분 가득했던 아삭한 고추가 종이처럼 얇아져서 돌아왔다. 바스락바스락 반 투명하게 잘 마른 고추 안에 금빛 씨앗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말린 고추를 가지고 방앗간으로 갔다. 고춧가루를 빻으러 오신 분들이 많았다. 남편과 내가 들어선 순간 어르신들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됐다. “어디서 왔어?” “이 고추는 샀어?” 고추가 가루가 되길 기다리는 동안 한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눴다. 젊은 부부가 시골에 와서 사는 게 대단하다며 농사 방법에 대한 많은 걸 알려주셨다. 할머니는 소일거리로 고추농사를 지으신다고 했다. 우리는 둘이서 겨우겨우 낑낑대며 키웠는데 이걸 소일거리로 하신다니…
“고춧가루 나왔어요~.”
방앗간 사장님이 막 나온 고춧가루를 파란 봉다리에 넣어 건네주셨다. 따끈따끈 열기가 느껴졌다. 코를 간질이는 짙은 매콤함에 재채기가 나왔다. 조청 같은 달큰한 향기가 느껴졌다. 고추를 많이 땄다고 생각했는데 말리고, 가루로 만들고 나니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금같이 귀한 가루였다. 모종이 커서 꽃을 피우고 열매 맺었다. 손톱만 했던 작은 고추가 다 자라 고춧가루가 되어 우리 품에 들어왔다. 돌아보면 숨차게 빨랐던 고추의 생애가 달큰하고 매콤하게 결말을 맺었다.
ㅡ방앗간에서 만난 할머니가 허리 아프지 않게 고추 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내년에 꼭 이렇게 해보라면서. 할머니는 가슴팍엔 가방을 메고 밭고랑 사이에 조랑말 장난감을 타고 다니면서 딴 고추를 가방에 담으신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허리도 안 아프고 좋아~사서 해봐~.”
‘그런데 어쩌죠 할머니. 저희가 조랑말 탈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고추 농사…두 번 다신 못 하겠어요...’
역시, 농사 박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