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상한 상관관계
미리 말해 두자면, 제목의 ‘소풍과 사생 대회’는 범학교 적 소풍 및 사생 대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개인의 이야기이다. 1학년 가을 소풍이었다. 그 시절엔 요즘처럼 버스를 대절해서 가는 게 아니라 일단 운동장에 집합해서 반 별로 줄지어 목적지를 향해 행진했다. 한 반 인원이 육십 명을 넘어 칠십 명에 육박할 때였다. 학급도 지금보다는 훨씬 많았으니 그 행렬은 꽤 길었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 경기도에 있는 초등학교의 소풍날은 동네잔치 비슷했다. 일찌감치 운동장에서 장사를 하던 장사치들도 행렬이 출발하면 함께 따라붙었다. 집에서 무료하게 지내시던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기도 했다. 1학년 봄 소풍은 기억나지 않지만 가을 소풍만큼은 기억나는 이유가 있다.
나는 소풍 며칠 전부터 엄마를 졸랐다. 이번 소풍엔 엄마 꼭 와야 한다고. 같이 가자고. 조르고 졸라 끝내 허락을 받아냈다. 이때가 아버지 건강상 사업을 접고 두 분 다 집에 계신 때였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중요한 지점이다. 엄마가 집에 계실 때였는지 아니면 아버지와 같이 일하느라 출근해야 할 때였는지에 따라 내가 엄마를 원망해도 되는 범위가 달라진다. 학교에 일찍 들어가 한여름이 되어서야 만 여섯 살이 됐던 나는 소풍에 엄마가 따라오는 아이들이 몹시 부러웠다. 나도 엄마 있는데.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와 한자리에 앉아 김밥을 먹고 소풍을 즐기는 풍경. 내 일곱 살 인생 최대 로망이었을 것이다.
행렬이 출발하기 전 운동장에선 장사치들이 소풍날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추억의 옛 불량식품, 그런 것들을 팔았다. 내 기억 속의, 1학년 가을소풍이 시작되기 전 운동장 풍경은 마치 느릿하게 돌아가는 영화의 한 장면이다. 살아온 날들 가운데 그처럼 순수한 기쁨으로 행복했던 순간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 또 있었네. 스무 살에 운전면허 시험 통과한 날. 게다가 첫눈까지 내렸었지. 이렇게 드문, 또 다른 내 기쁨의 하루가 될 뻔했던 그날은 아이들이 신이 나서 떠드는 소리가 배경으로 깔리고 빛나는 오전 햇살이 나를 따라다녔다. 다가올 엄마와의 만남에 들떠 나풀거리며 운동장 여기저기를 신이 나서 빙글 뱅글 돌아다녔다. 그런 내 주위로 온갖 색깔의 꽃잎이 날리기라도 하듯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제 곧 엄마는 나를 찾아오실 것이다. 엄마가 나를 위해서. 동생은 없다. 엄마와 나만의 시간. 이 얼마나 멋진가.
이날, 엄마는 조금 늦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내내 엄마를 기다리던 나에게 인제 그만 행렬에 따라붙으라 하셨을 것이다. 엄마가 조금 늦어서 뒤에 따라오고 계신다고 계속 나를 안심시켰을 것이다. 연신 뒤를 돌아보던 나는 그 말을 믿고 행진을 마친 후 엄마와의 점심시간을 기대하며 걷고 있었겠지.
1학년 담임 선생님은 화가 대단히 많은 분이었는데 내 자리는 선생님 교탁 바로 앞 자리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서류를 들추시다가 ‘아니, 우리 반에 다섯 살짜리가 다 있네’ 하고 놀라셨다. 나는 학교에 일찍 들어와서 다른 친구들보다 한 살 적은 일곱 살인데 나보다 무려 두 살이나 적은 아이가 있다니? 그 아이가 누군지 무척 궁금해진 나는 ‘누가요?’ 묻자, 코 앞에서 호령이 떨어졌다.
‘누구긴 누구야, 바로 너지!’
내가 다섯 살이라니?? 난 일곱 살인데? 만 나이 개념을 모를 때였다. 어리둥절한 채로 무안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어떤 날은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뭔가 억울한 상황이었다) 내 말을 끊고 자리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그래도 몇 마디 더 했다가 고성을 들어야 했다. 교탁을 서류철로 탕탕 내리치는 선생님은 무섭고 또 그 상황이 서럽기도 해서 히끅히끅 울음을 참았다. 선생님은 아들을 한 명 두셨는데 우리와 같은 1학년이었고 다른 반이었다. 선생님은 우리 반에 들른 아들을 반 아이들 앞에서 이리저리 쓰러지라 휘두르면서 고함을 치고 쥐 잡듯이 야단칠 만큼 무서운 분이었다. 이유는 그 친구가 엄마한테 허락도 안 받고 문방구에서 뭔가를 샀기 때문이었다. 이제 1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코흘리개들은 칠판 앞에서 벌어진 느닷없는 광경에 얼마나 놀라고 겁먹었었는지. 그 무서운 선생님이 오셔서 양손으로 내 손을 잡고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말씀하셨다.
“엄마가 바쁜 일이 있다고 중간에 먼저 가셨어, 이거 너한테 전해 주라고 한 거야. 잃어버리지 않게 잘 갖고 있어”
선생님 손에서 내 손으로 건네진 것은 오십 원짜리 동전 한 개가 들어있는 앙증맞은 지갑이었다.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일곱 살 아이에게는 특별한 날에나 받을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 귀여운 지갑을 이전엔 본 적이 없었던 걸로 보건대 엄마는 이 순간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 같다. 엄마를 원망할 수 있는 범위 같은 건 애초에 필요 없었던 것이다. 희미해지긴 했어도 동전 지갑을 손에 쥐고 망연히 보고 있던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아직도 기억난다.
‘그럼 그렇지…. 엄마가 소풍에 따라와 줄 리가 없지...'
나는 울지 않았다. 가을소풍의 내 기억은 거기까지다. 동전 지갑을 손에 쥐기 전까지는 여러 장면이 기억나지만 이후 밥은 어떻게 먹었는지 누구랑 먹었는지 소풍은 어땠는지, 뭘 하고 놀았는지 보물 찾기를 했는지 수건 돌리기를 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그저 한 손에 쥐어진 동전 지갑이 드라마 연속극의 마지막 장면처럼 줌인되어 박제되었을 뿐이다.
2학년 봄에 똑같은 장소로 사생대회를 나갔다. 경기도 시골 국민학교에서 행사를 위해 어린아이들이 걸어서 갈 만한 곳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아직 이른 봄이었는지 황량했다. 아이들을 야산 중턱쯤에 풀어놓고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사생 대회답게 풍경을 그리라고 하는데 나는 도무지 뭘 어떻게 그려야 할지 손도 못 대고 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거라곤 이편에 아직 잎도 나지 않은 나무들과 저편에도 같은 나무들이 헐겁게 채워져 있는 황토색 야트막한 산이 전부였다. 저 별거 없는 눈앞의 풍경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안 났다. 또 곧이곧대로인 성격은 어릴 때도 다름없어서 이 작은 스케치북에 눈에 보이는 풍경을 어떻게 다 그려 넣어야 할지 너무나 막막하고 난감했다.
1학년 때 반 친구 중에 몸이 아파서 1학년을 며칠 다니지도 못한 채 쉬었다가 다시 1학년으로 들어온 친구가 있었다. 이름이 천주교 세례명인 여자아이였는데 그림을 잘 그렸다. 담임 선생님은 방과 후에 이 친구에게 그림을 따로 가르쳤다. 나머지 공부가 아니라 특별 지도를 받는 것이니 지금 생각하면 어린 마음에 그 친구처럼 그려야 잘 그리는 거라는 선입견이 생겼던 것도 같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 친구의 그림은 주제가 분명하게 보이면서 크레파스로 빈틈없이 꼼꼼하게 잘 칠해진 그림이었다. 핑계를 대자면 그 친구 때문에라도 나는 당시 그림 그리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결국 사생대회의 한정된 시간은 다 지나갔고 내 손엔 백지가 들렸다.
월요일, 전교생이 서 있는 운동장 애국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이 지난 사생대회 수상자를 호명하셨다. 담임 선생님은 슬며시 내 옆으로 오시더니 내 목덜미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살살 흔들면서 나지막하게 말씀하시는데 마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왜 그림을 안 냈어. 응!, 그림만 냈으면 네가 저기 나가서 상을 받았을 거 아냐”
아마도 모친께서 우리 애 잘 봐주십사 촌지를 드린 모양이었다. 모친은 내가 미술상 받는 일에는 그다지 관심 없으셨을 테지만 그로부터 가장 가까운 상을 탈 수 있는 행사가 사생 대회였고 내가 죽이 됐든 밥이 됐든 그림을 그려서 냈으면 상은 탔을 터였다. 그랬으면 나는 내가 그림을 꽤 잘 그린다고 여기게 됐으려나? 타의로 생긴 자신감은 어린아이에게 약이 됐을까, 독이 됐을까. 나는 내가 상을 못 받은 게 어린 마음에도 전혀 아쉽지 않았다.
학교에서 직접 그리는 교내 대회가 아니라 외부 대회 예선은 이미 완성이 된 그림을 제출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경우는 가족이나 미술학원 선생님의 도움 받은 그림으로 본선에 참가할 수 있게 된다. 미술 학원에서 수업 시간에 그리는 그림도 선생님이 마무리해 준다든가 하면 학부모나 아이들은 아이 자신의 실력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다 학원에서 선생님 손이 닿은 그림과 학교나 대회에서 혼자 그린 그림의 결과물 사이에 갭이 생기면 그때야 당황하게 된다. 요즘은 이런 구태의연한 식의 학원들이 없을 것이다. 예전과 달리 현재는 바람직한 형태의 미술학원들이 생기는 추세라 다행스럽다. 나는 학교 대회나 외부 각종 대회에의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수업했는데 그러다 보니 그 학원은 그렇더라고 소문이 나게 되고 시나브로 지향점이 맞는 학부모들이 보낸 아이들로 대략 구성이 된다. 그렇게 내 바람대로 그림의 시작부터 완성까지 아이 혼자 힘으로 그릴 수 있도록 지도할 수 있었다.
또 나는 2학년 이른 봄에 있었던 사생대회의 그 막막함을 잊지 않고 있다가 그림 시작하는 아이들이 자신 없어하고 어려워할 때 끄집어내서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 전체를 다 그리지 않아도 되고 똑같이 그리지 않아도 된단다. 그중의 한 부분만 그려도 되고 네가 그릴 수 있는 만큼만 그리면 된다고(특히 이 부분을 강조한다). 그림 그리기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그날의 내 심경이 기준이 됐다. 네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와 똑같이 그리려면 사진을 찍으면 되지 왜 그림을 그리겠냐고, 너 태어났을 때 엄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엄마 안녕하세요, 반가워요라고 말할 수 있었냐고? 만약 그랬으면 엄마가 너무 놀라서 기절했을걸? 아이들은 까르륵 웃는다. 그림도 마찬가지라고. 이제 시작인데 네 생각대로 쓱쓱 그려지면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말할 수 있는 것만큼 이상하지 않냐고. 아이들은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배시시 웃으며 연필을 다시 쥐었다. 이 예시의 효과는 좋았다. 사생대회 때 나에게도 누군가 이렇게 얘기해 줬다면 마치 소풍 놀이에서 보물을 찾아 신이 난 것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산에서 내려올 수 있지 않았을까? 비록 1학년 가을소풍에서는 내 발로 내려오지 못했지만.
몇 년 전 엄마와 텔레비전을 보다가 100호 집 살 때 옆집 아저씨 얘기가 나왔다. 마땅한 직업도 없이 가장 역할을 제대로 못 하는 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없다는 핑계로 첩을 뒀는데 텔레비전 내용이 그 아저씨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100호 집 살 때 옆집 아저씨도 저렇지 않았나?”
“너 거기 살 때 소풍날 그 아저씨한테 업혀서 집에 왔잖아”
“왜요??”
“탈진해서”
옆집 아저씨는 당신 딸이 여럿인데도 이웃집 딸인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다. 옆집 아저씨 딸 중에는 나랑 같은 학년의 여자아이도 있었다. 아저씨는 딸내미 소풍에 따라오셨다가 널브러진 나를 발견하셨겠지.
그랬다. 그날의 내 기억이 동전 지갑을 들여다보는 장면에서 멈췄던 이유는 실망이 컸던 나머지 탈진을 하고 기억이 끊겨 버린 거였다. '탈진'이란 단어가 귀에 꽂히자마자 자석처럼 소풍날 그 문제의 작은 동전지갑이 찰칵 떠오르며 두 단어가 붙어버렸다. 엄마는 지키지 못한 내지는 지키지 않았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말씀하실 때 희미하게 웃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상황, 그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마는 6남 1녀 고명딸로 남자 형제분들 사이에서 성장한 탓인지 건조하신 분이다. 꽤, 많이, 매우, 상당히. 그에 반해 나는 또 너무나 예민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한마디 툭 던지고 돌아선 엄마는 무슨 일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연못에서 놀고 있는 개구리한테 돌 던진 아이의 표정이 저렇겠구나.
나는 사생대회에서 왜 그렇게 그림 그리기가 어려웠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다. 가을 소풍에 묻어뒀던 상실감, 배신감, 체념에 따른 텅 빈 마음이 다음 해 이른 봄의 황량함과 오버랩되지는 않았을까? 같은 장소다 보니 무의식으로 억압된 마음에 표현이 막혀서 사생대회에서 그림에 손도 못 대고 하산해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왜 그 건너편 텅 빈 산을 바라보는데 황량함과 막막함만을 느꼈을까? 아니, 어쩌면 내 기억에서만 그 이른 봄의 야산이 황량했던 것이지 사실은 개나리, 진달래가 피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무 예민한 아이여서 유난스럽게 탈진까지 해가면서 기억을 왜곡시킨 것일까?. 그 나이 때는 내가 엄마한테 말하지 못한 내 잘못을 다섯 손가락을 펴 하나, 둘, 셋 꼽으며 언제 자백해야 하나 고민했었다. 그 작은 마음으로 그림도 못 그리고 산에서 백지만 들고 내려오는 마음은 또 얼마나 무거웠겠나. 지금 이 문단을 쓰는데 얼굴은 열이 올라 붉어졌고 가슴은 두근거리고 속이 몹시 울렁거린다.
이유는 모르겠다. 내 의식은 그저 내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옮기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고만 생각했는데 무의식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었단 생각이 지금, 이 순간 들었다.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글의 이런 흐름과 몸의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혹스럽다. 설마 수십 년이 지나 어린 시절 그때 일을 회상하는데 이런 증상이 생긴 거라면 한 계절 차이 가을 소풍과 이른 봄 사생대회의 오버랩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아니다.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설마, 수십 년 전 일 때문에 지금 얼굴이 붉어지고 속이 울렁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그냥 그림 좀 자신 있게 못 그린 걸 가지고 갖다 붙이기는. 침잠해 있는 것들을 굳이 휘저어 흙탕을 칠 필요는 없다.
아무튼 나는 가을 소풍의 진실을 오랜 후에 알게 되었다. 엄마는 소풍 행렬이 시작되기 전 학교에서 이미 동전 지갑을 선생님께 전달하고 되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걷는 나를 신경 쓰셨던 것이다. 아, 그래. 그랬었겠구나. 엄마는 그날도 별일 아니라는 표정이었겠지. 옆집 아저씨한테 업혀 온 나를 보면서도 그런 표정이었을까. 엄마, 그런데도 나는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사랑했었는지 알아? 소풍과 사생대회의 상관관계 같은 건 몰랐어도 말이야. 엄마는 그런 내 마음 따위 몰랐겠지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