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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십 Apr 02. 2021

어느 봄밤, 잃어버린 지갑 대신

봄만 되면 그렇게 뭔가를 하나 사고 싶다.


마흔 살 내게 봄이란,

물욕부터 차오르는 계절이다.


반면 스무 살의 봄은 나른하게 찾아오는 설렘이었다. 해 질 녘 가로등 붉은빛 아래 부서지던 하얀 벚꽃잎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던 마음이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싹이 돋아나고 샛노란 개나리가 꽃무리를 지을 때면 내 기분도 하루 종일 저 높은 구름 위로 두둥실 떠다니곤 했다.


손가락만 갖다 대도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와의 만남을 시작하던 계절은 늘 봄이었다.


@oberyodom / unsplash.com



어느덧 제법 친해진 직장 선배들과 한잔하고 집에 돌아가던 스물여섯 살의 어느 봄밤, 아끼던 지갑을 잃어버렸다. 브랜드 로고가 은은하게 음각된 검은색 반지갑이었다. 분명 노래방에서 흘린 거 같았는데 SBS 노래방 사장님은 없다고 했다.


헛헛한 마음으로 침대에 눕는데 문자가 왔다. 팀 선배들 중 한 명에게서. 좋아한다고. 설마 했는데 진짜로 고백하다니. 당황스러웠다.


다음 날 사무실에서 어떻게 그 선배를 마주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이건 일이건 열린 문을 두고 돌아서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틀 정도 고민해 보고 그러자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귀기로 했다.


대부분의 사내 연애가 그렇듯 비밀로 시작했으나 첫 데이트 장소는 대범하게도 코엑스였다. 십 년 전 지나간 인연도 만나게 해 준다는 코엑스에서 비밀 연애는 무슨!


저 멀리 커다란 기둥 뒤에서 손을 흔드는 그가 보였다. 평소엔 슈트 차림이어서 몰랐는데 아뿔싸, 사복 입은 그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엄청 깼다.


초록색 점퍼와 통 큰 바지. 90년대에서 타임 슬립 한 것 같았다. 사귀기로 한 거 도로 무를 순 없나. 그대로 뒤돌아서 도망치고 싶었다.


첫 만남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우리는 이후 거의 매일 같이 만났다. 회사 앞 무교동 낙지집 앞은 우리의 비밀 접선 장소. 시간을 두고 엇갈려 나와 그곳에서 몰래 만나곤 했다. 짜릿하고 스릴감 넘쳤다.



한 번은 봄 바다가 보고 싶었다.


여름 바다야 익숙했고 새해 일출 보러 겨울 바다도 봤지만 봄 바다는 어떨는지 스치듯 흘린 말이었다. 평일이었고 여덟 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


그는 바로 운전대를 틀었다. 텅텅 빈 고속도로를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강릉의 봄. 고요하고 적막한 밤바다가 우릴 맞아 주었다.


땅에 떨어진 벚꽃잎을 즈려 밟으며 근처 정자도 올라갔다. 서늘하고 습한 바닷바람에 자꾸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떼내며 높은 곳에서 바라보던 밤바다는 달이 만들어 내는 빛 고랑으로 반짝거렸다.


@jessgardener / unsplash.com


찰나의 바다를 눈에 담고 다시 서울로 출발했다. 새벽 운전 피곤할 법도 한데 도착하면 깨워줄 테니 편안하게 자라고. 그때만 해도 운전자 동승석에서 조는 건 매너가 아니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자라니까 그냥 잤다.


그의 겉옷 점퍼를 위에 걸친 채 정자에서 내려오며 생각했다. 왜 지금에서야 만났을까. 더 빨리 만나지 못한 시간들이 아깝기까지 했다.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봄 바다에 취했었나 보다.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그날은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어느덧 흐른 십오 년의 세월,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게 거짓말 같다.


여전히 우리는 함께 그때의 기억을 추억하고 있다. 다만  기억의 모서리가 가끔  맞지 않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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