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와 소나기, 태풍의 영향으로 내린 비까지. 비가 많았던 탓인지 이번해는 가을이 유독 반가웠다. 아직은 여름과 가을 사이라고 말하고 싶다. 계절 사이사이 나눠 아쉬운 대로 배로 늘려본다. 그래서 지금 내게는 세 번째가 아닌 네 번째 계절이다.
완연한 여름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를, 가을 보다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그 사이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사이의 계절에 서보면 뒤로는 아련함이 앞으로는 설렘이 놓여있다. 처음에는 아련하다가 점점 자주 설렌다.
여름이 어떻게 갔을까. 제일 먼저 나뭇잎들이 싱그러움을 잃었다. 싱그러움을 잃는 것은 여름을 잃는 것. 하지만 초록의 생기가 사라져 갈 때 분명 자연 속에는 새로운 생기가 불어넣어 진다. 그것은 선선한 바람을 타고 온다. 여름내 살랑이던 나뭇잎들이 이제 그 바람에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그늘 사이사이에 더 많은 햇살의 자리가 생겨난다.
소나무 향이 진해지고 깻잎은 향긋해지고 논길을 따라 걸으면 알알이 맺힌 낟알에서 씁쓸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더위에 둔해진 후각이 살아나 바람결에 실려온 온갖 신선함과 향긋한 내음이 맡아진다. 가을바람. 바람에게 가을이 붙는다. 어디 바람뿐일까. 햇살, 윤슬, 비, 구름, 하늘 모든 것들이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시작과 마찬가지로 언제 어디서 멈췄는지 모른 채 마지막을 맞이했다. 나는 이제 여름 내 흥얼거렸던 선율과 눈으로 찾아갔던 만화 속의 수많은 풍경을 뒤로하고 가을을 따라간다.
습관처럼 열어 놓고 잔 창문으로 찬 기운이 스며 들어온 아침.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깨어 수첩을 펼쳤다. 미술관 가기, 등산 가기라는 나름의 계획을 세워놓고 이번 가을에는 강가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든 풍경을 꼭 제대로 보겠다는 소소한 계획도 적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