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미국변호사가 들려주는 미국소송 이야기
미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한국분들로부터 종종 듣는 얘기 중 하나가, "변호사님, 저 같은 케이스는 미국에서 소송해봐야 돈만 더 들고 소용없겠지요?" 이다. 그 분들의 얼굴에는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체념이 섞여 있다. 그 분들이 먼저 상담을 했던 한국 변호사가 "아이고 미국은 변호사 비용이 워낙 비싸서 고객님이 청구하려는 금액 정도는 받아봐야 변호사 비용으로 다 나가요"라고 포기하란 식으로 얘기를 듣고 필자에게 찾아온 경우도 많이 있었다.
미국에서의 소송이 일반인들에게 워낙 비싸고 복잡한 절차인지라, 미국에 있는 개인이나 기업들이 이를 악용하여 돈을 떼먹고 배째란 식으로 나오는 경우도 종종 보게된다. 몇 만불 수준으로는 미국에서 소송을 해봐야 금전적으로 득보다 실이 많다는 점을 악용하는 정말 악질인 경우이다. 필자가 만난 한국 고객분 한 분 역시, 미국에 있는 채무자로부터, "그쪽이 미국 사정을 잘 모르셔서 그러시는데, 이 정도 돈으로는 소송 걸어봐야 소용없어요~"라는 얘기까지 듣고, 설령 잃는게 더 많더라도 이대로 넘어가면 홧병으로 제 명에 못살 것 같다는 생각으로 미국 소송을 결심하신 분도 있었다.
미국 소송이 왜 이렇게 비용이 많이 드는지에 대해서는 앞서 여러 글에 걸쳐 이야기해 본 바가 있다. 기본적으로 소송의 "장기화"와 "비정형성"에서 오는 구조적인 문제라고 분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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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로펌에서 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친한 지인 변호사와 대화를 하다가 그 분이 이렇게 얘기를 했다. "감정을 전부 배제하고 정말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미국 소송은 안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이겨도 상처뿐인 영광인 미국 소송은 피할 수 있다면 무조건 피하란 의견이었다. 그래서 내가 반문했다. "아니 변호사님은 소송을 주된 업으로 하고 있는데 왜 그렇게 생각을 하시는 거죠?" 그러자 그 변호사는 이렇게 답변했다. "정확하게는 원고로서의 미국소송을 가급적이면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야. 난 주로 피고들을 대리하는데, 이 사람들은 피하고 싶다고 피할 방법이 없거든. 근데 피고를 대리하여 소송을 진행하는 그 과정에서 (피고와 피고 변호사들의 행동으로 인하여) 상대방인 원고가 겪는 비용적인 부담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상담하시는 분들의 참으로 안타까운 사정을 들으면서도 나 역시 섣불리 "그래도 끝까지 소송으로 해 보시죠!"라고 권하지 못하는 이런 상황이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그렇다고 다른 변호사들처럼 "이 정도 돈은 소송해봐야 소용없어요" 라고 그냥 포기하란 식으로 냉정하게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음식점에서 내가 시키지 않은 메뉴가 오버차지될 경우, 억울하게 청구된 그 $10~$20, 1~2만원에는 핏대 높여 따지면서, 이 분들이 억울하게 날리게 될 수 백, 수 천만원 앞에서는 내 돈이 아니라고 어찌 그리 쉽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그들의 감정적인 부분이 돈으로만 실익을 따져서 정리될 수 있는 부분일까? 조금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감정과 이성의 그 사이에서 적절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변호사의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고객분들의 감정적인 부분에는 억울함과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가장 크다. 그리고 그 억울함과 분노라는 감정 속에는 아무런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상대방이 잘 사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하는데서 오는 무기력감과 답답함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더 이상 나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이타적인 마음도 포함되어 있다. 필자가 상담을 했던 분 중에 한 분은, 미국기업이 상대방이 한국의 작은 중소기업이라는 점을 이용해 돈만 먼저 받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물건을 보내지 않다가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었는데, 돌려받아야 할 돈의 액수가 소송으로 갔을 때 변호사 비용보다는 적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경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포기한다면, 그 미국기업은 계속하여 한국의 힘 없는 작은 영세업자들을 상대로 이런 사기 거래를 계속할 것이고, 이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겠다는 생각으로 소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셨던 분이 있었다. 과연 이런 감정적인 부분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는 것을 금전적으로 가치를 매긴다면 어느 정도일까?
그렇다면 이제 이성적으로 접근해보자. 미국 소송에 들어가는 비용은 크게 1) 법원의 filing 비용, 2) 변호사 비용, 그리고 3) 기타 부대비용(교통비, 미국 체류비 등) 등이 있다.
1) 법원의 filing 비용
한가지 다행인 점은, 미국 소송은 청구하는 금액에 따라 인지대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청구하는 금액이 클 수록 한국보다 법원에 납부해야 할 인지대 부담이 적다는 장점이 있다. 예컨대, 2021년 1월 기준, 캘리포니아 주 민사법원의 경우 청구금액이 $10,000까지는 $225, $10,000 초과 $25,000이하는 $370, $25,000을 초과할 경우 $435의 filing fee를 부과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연방법원(Central District)의 경우 민사소송은 $350의 filing fee를 부과하고 있다. 청구금액이 적은 경우에는 한국의 인지대에 비해 비싼 편이지만, 청구금액이 수 십만불 이상이 될 경우에는 한국의 인지대에 비하여 상당히 저렴한 편이다. (cf. 한국 민사소송 청구금액 1억원인 경우 인지대는 대략 455,000원)
따라서, filing fee가 크게 부담이 되어 미국소송을 포기해야만 하는 경우는 많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 변호사 비용
사실 미국 소송에서 가장 큰 비용이 발생하는 부분이다. 예전에도 몇 번 언급하였다시피, 미국 소송의 경우 변호사들이 보통 시간당 임율(i.e. 타임차지)에 따른 비용을 청구하기 때문에 쉽게 비용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크다. 그런데 이 부분은 어떤 경우에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통상 송무변호사들이 착수금을 받고 사건을 진행하기 시작하면 이 착수금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돌려받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 착수금 천 만원으로 시작한 소송인데, 소장을 접수하자마자 피고 측에서 합의를 제안해와서 합의로써 원만히 분쟁이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변호사에게 지급한 천 만원은 돌려받을 수 없다. 그 시점까지 실제로 변호사가 그 사건에 투입한 시간이 불과 몇 시간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반면에, 미국에서는 변호사가 실제로 업무에 투입한 시간만큼만 청구하기 때문에, 그 시간이 불과 2~3시간만에 사건이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물론 변호사의 시간당 임율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불과 1~2천불만 변호사 비용으로 지불하고 사건이 종결될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쉽게 끝나는 사건이 많지는 않다. 고객 입장에서도 상대방이 협의에 응하지도 않고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니 최후의 수단으로써 소송을 택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건이 실제 재판(법정에서 변론기일이 열리는)까지 가는 경우도 거의 없다. 소장이 접수된 사건의 95% 이상은 변론 전에 합의로써 종결이 되는데, 그 합의 시점을 케이스 초반(특히 디스커버리 전)으로 잘 유도한다면, 실제로는 변호사 비용이 크게 발생하기 전에 사건을 마무리 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또한, 상대방 역시 방어를 하기 위해서는 똑같이 변호사 비용이 발생한다는 점을 역으로 잘 이용할 필요가 있다. 변호사 비용은 나에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단 소송이 시작된 이상 상대방 역시 비용의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차피 소송 끝까지 가봐야 원고에게 줘야 할 돈은 똑같다면, 굳이 원고에게 더 많은 변호사 비용을 발생시키기 위해서 소송을 질질 끌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3) 기타 부대비용 (교통비 및 미국 체류비 등)
이 부분은 한국 고객분들이 특히 간과하기 쉬운 항목이다. 한국 내에서는 소송을 위한 거마비 부분은 크게 생각할 부분이 없다. 어느 법원이든 다 1일 생활권이고, 교통 비용이 크게 들 부분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조금 다르다. 워낙 나라가 크기 때문에 이동해야 하는 거리도 길고 그로 인한 비용 발생도 꽤 높은 편이다.
특히, 본인이 한국에서 미국에 올 때 발생하는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일단 사건을 변호사에게 맡기면 모든 절차를 변호사가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사건의 당사자는 최소 1번에서 3번까지는 미국에 직접 와야한다. 일례로 변론 전 조정기일에 반드시 참석해야 하고, 디스커버리 데포지션(Deposition)을 위해서도 최소 1번은 참석해야 한다. 그리고 법정 변론기일(Trial)까지 가게 된다면 이 때도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 실제로 조정기일과 데포지션에 참석하는 시간은 하루 내지 이틀 정도에 불과하지만, 어쨋든 최소 3번 정도의 왕복 항공비와 미국 내에서의 숙박비와 식비 등의 체류비 등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만약 법원이 있는 지역의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경우라면, 변호사가 법원에 출석하기 위하여 드는 교통 비용 역시 고려해야 한다. 간혹 데포지션을 할 당사자가 다른 주(State)나 다른 도시에 있는 경우, 그 곳까지 오고가는 비용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에서야 제주도 왕복 항공비 정도가 고려할 최대치겠지만, 미국에서는 동서부를 오고가는 항공비를 포함하여 1일 생활권이 아니기 때문에 숙박비 등의 부대비용이 상당히 높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감정과 이성 그 사이에서 적절한 합의점을 찾아보면 좋겠다. 미국소송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그러나 시간이 길게 늘어지더라도, (비용발생을 아예 막을 수는 없겠지만) 적절한 수준으로 비용을 통제할 수 있다. 미국 소송 비용을 줄이는 방법들에 대해서도 예전에 얘기한 바 있다. 물론 길게 늘어지는 경우에는 상대방 역시 비용 발생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고려하여 상대방이 어느 정도의 자력을 갖추었는지를 잘 생각해서 소송을 시작할 필요는 있다. 상대방 역시 넉넉한 형편이 아니라면 조기에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수월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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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송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그 전에 찾아보면 적은 비용으로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각 주별 소비자보호기관 등을 통한 민원 접수 또는 민간기관에 의한 조정 시도 등)들도 있다. 특히 상대방이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예컨대 한국)에 있다는 점을 악용하여 "억울하면 소송하시든지!"라고 배째라는 식으로 나오는 악의적인 미국인 또는 미국회사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적어도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 역시 가만있지는 않겠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보여주는 것도 필요하다. 한국에서도 당사자가 백날 문자나 전화로 좋게 좋게 얘기하면 반응도 없다가 변호사 이름으로 공식적인 내용증명을 보내니까 그제서야 대화를 하자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듯이, 미국에 있는 상대방에게 계속 당사자가 이메일을 보내봐야 별 효과가 없을 수 있다. 미국에 있는 로펌, 미국 변호사를 통해 잘 정돈된 클레임 레터(claim letter)를 작성하여 보냄으로써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면, 상대방이 날 쉽게 보거나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미국은 흔히 협상(Negotiation)의 나라라고들 한다. 서로의 감정을 극으로 끌고가지 않으면서 중간에서 타협점을 찾아낼 수 있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이 있다. 감정에만 치우쳐서는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이성으로 감정을 너무 억누르면서 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다. 분명히, 감정과 이성, 그 사이에 적절한 지점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