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내 딸
나는 삼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삼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스펙타클한 사춘기를 보냈다. 아직 남아있는 둘째의 삐딱함 때문에 아내는 꽤나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그 삐딱함은 남아있어 나를 잘 간파한 민수형은 나를 놀부라 부른다. 아무리 놀부라도 아내와 딸은 좋다.
핑계이지만, 자랄 때 집에 남자들 밖에 없기 때문에 딸들이 자라면서 나는 많은 시행착오를 지나야 했고 지금도 지나가고 있다. 딸은 아들보다 키우기 쉽다는 말이 사실인지 모르지만, 아내는 나를 보면서 '아들 낳았으면 어떡할 뻔했냐'며 딸만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동감한다. 나 같은 놈이 나와서 나처럼 속을 썩였으면 나는 '없는' 그 아들이 가출하기 전에 내가 가출했을 것이고 '없는' 그 아들과 아내가 나를 찾아다녔을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하지만, 딸이라고 해서 쉽지만은 않다. 좋은 것만 기억나서 그런지 몰라도 내 사랑하는 첫째 딸은 비교적 무난하게 중, 고등학교시간을 지난 것 같다. 이 부분은 큰딸과 심도 있게 토론 후 다시 적어봐야겠지만, 지금 질풍노도의 시간을 지나는 내 사랑하는 둘째 딸의 중, 고등학교 시간은 너무나 실감 난다.
큰딸의 사춘기가 휴대폰으로 찍은 옛날 영상을 보는 느낌이라면 둘째 딸의 사춘기는 재난영화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랄까? (사실 난 스릴을 즐기는 편이다)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면서 깨달은 사실이지만, 낙랑(朗朗) 18세는 정말 밝고 명랑하다. 내 사랑하는 둘째 딸도 밝고 명랑하다.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는...
궁금해서 물어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왜. 뭐."
일반적인 질문형 단어는 끝이 올라가는데 내 사랑하는 둘째 딸의 질문형 단어는 마침표로 끝난다. 표정도 마침표다.
둘째 딸 어릴 적 생각이 난다. 내 새끼손가락을 꼭 붙들고, 내 목을 꼭 끌어안던 그 딸이 저기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텐데, 그 딸을 찾으려 둘째 딸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엄마, 아빠 왜 이러는 거야?"
"좋아서 그러지"
아내가 나 대신 대답한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우리 두 사람에게 동시에 하는 말이다. 참으로 효율적이다.
딸은 언제나 당당하다. 무엇을 하든 정당한 이유가 있다. 그렇게 주장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나는 딸에게 말한다.
딸은 "꼰대"라고 말하며 내 말을 차단한다.
나는 '괜찮은 이야기도 듣지 않는 너는 젊꼰'이라 생각하며 "너는 똑똑하니까 잘 생각해 봐"라고 말한다.
오늘 둘째 딸은 세상 모두가 부러워할 뽀얀 얼굴에 화장을 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
딸이 말한다.
"왜. 뭐."
"이뻐서 헤헤"
'좀 씻고 화장을 하는 게...' 말이 새어 나오지 않게 입을 막았다.
딸은 화장을 하고 나는 환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