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레시피」 쓸데없지만 쓸모 있는 - 03
이름은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그 안에 사연이, 의미가 그리고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이름 부자입니다.
엄청난 부자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부자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주신 공식적인 이름과 집에서 부르는 이름부터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이름
활동할 때 사용하는 이름
글모임에서 지어준 이름
직장에서 지어준 이름
지인이 붙여준 이름들까지..
이름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시가 있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그런 점에서 참 의미 깊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 부문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내가 나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요.
기왕이면 직접 지은 이름을 불러 주면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을요.
우리가 가진 공식적인 이름은 우리의 것이지만 우리로부터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직접 자기의 이름을 지어보는 건 뜻깊은 작업일 겁니다.
이 이름을 쓰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 이 이름을 통해 어떠한 시간을 담고 싶은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이름이 어떻게 불리어지길 바라는지 등을 고민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길 테니 말입니다.
저는 이름뿐만 아니라
어떤 시간, 어떤 사건, 어떤 대상 그리고 노트나 일기에도 이름을 붙이곤 합니다.
그러고는 손으로, 입으로 자주 불러줍니다.
나의 이야기이니까요.
일진이 매우 사납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의 상태를, 나의 시간을 호명할 만한 이름이 없다는 걸 느끼곤 마음이 슬펐습니다.
이름을 갖는다는 건, 내가 나다운 의미를 지닌다는 말과 같으니까요.
나다운 이름을 갖는 것..
그 이름에 맞게 살아가는 것..
나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야말로 행복한 일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재미있는 책이 생각납니다.
'세상의 모든 물건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는 문구가 기억에 남는 「그거 사전」
퍼뜩 떠오르지 않는 이름 대신에
'그거'라고 지칭되는 수많은 물건들.
이름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숱한 '그거' 친구들.
그들의 이름을 향한 즐거운 여정이 담긴 책입니다.
H-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