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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 발견하기

「삶의 레시피」 쓸데없지만 쓸모 있는 - 04

by 율하



*1편, 2편, 3편은 글을 읽는 '당신'을 향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저'에게서 출발하는 이야기들입니다. 톤 앤 매너가 달라진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나는 지극히 오른손잡이로 살고 있다.

왼손이 주도적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걸 새삼 느끼는 바, 나의 틈새 발견의 화두는 바로 '왼손잡이'다.


책과 노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당장 책장 앞으로 가서 오른쪽 중심으로 놓여 있던 책들을 왼쪽 중심으로 바꿔본다. 시선처리가 왠지 자연스럽지 않아 고개가 굳이 왼쪽으로 기울어진다.


친구를 보자마자 대뜸 오른손을 내어놓으라 했다. 왼쪽으로 팔짱을 끼고 손깍지를 꼈지만, 영 자세가 나오지 않아 그냥 가볍게 맞잡았다.


휴대폰 역시 왼손으로 사용하려고 하니 종종 엉뚱한 것이 눌리거나 예상치 않은 화면전환으로 당황하는 일이 잦아 살짝 피로감이 몰려온다.


그렇다면 꾸준히, 오래도록 해볼 수 있는 경험은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해보자며 왼손에 펜을 들고서 무언가를 끄적거리다가 생각했다.

"바로 이거군!"









철저한 오른손잡이로서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글씨를 쓴다. '공'(정성과 노력)을 들이고 '애'(마음과 몸의 수고로움)를 쓴다.


특히나 자세가 자연스럽지 못해 여러모로 상당히 의식을 해야 한다.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른손잡이에게 길들여진 볼펜은 볼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종종 글씨가 끊기곤 했다.






천천히 반복해서 같은 글자를 쓰다 보면 어느 순간, 글자들이 매우 낯설게 다가온다.

'이게 맞나?' 싶은 생각에 속도는 더욱더 느려진다.

겸손해지고 침착해지며 몰입하게 된다.

절대로 편법이 통하지 않는다.


나는 왼손잡이가 될 수 없다.

이제 와서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럼에도 굳이 그 길을 걸어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의 틈을 발견하고 '나만 아는 은밀한 쾌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또 다른 가능성과 만날 수 있기에 나는 이러한 과정을 '최선의 실패'라 부른다.





하나, 둘, 셋...

최선의 실패가 모여 연대한다면

나의 세계

그리고 너의 세계,

어쩌면 우리의 세계가 조금은 더 윤택해지지 않을까...


H-er.



*커버 이미지 - '호퍼 부부가 관람한 연극 티켓 모음', <에드워드 호퍼 : 길 위에서> 展, 서울시립미술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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