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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왜 나만 보고 있을까요

「사치 권장 프로젝트」 마음의 장바구니 - 27

by 율하



어느 날, 브런치북의 두 세계관을 합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치 권장 프로젝트」 '마음의 장바구니' 속 그림책 선정을 「삶의 레시피」 '쓸데없지만 쓸모 있는'의 글과 연결 지어 선정하고 있습니다.
이번 책은 「삶의 레시피」 열일곱 번째 글 '최선의 실패'와 연결됩니다.



실패란 말속에는 숱한 감정의 조각들이 깔려 있다.

슬픔이, 뜨거움이, 지독함이, 아쉬움이, 조바심이, 회한이, 원망이, 반짝임이...

드물게는 그 속에서 기쁨을 발견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바로 엊그제 프로젝트 공유회를 앞두고 밤을 새워서 진(zine)을 만드는 내 모습 같은..?

사실 진(zine)이 완성되든 안 되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공유회 자리에서 진(zine)을 일일이 넘겨볼 사람도 딱히 없다. 그럼에도 난 밤을 새워서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최선의 실패'다.



'최선의 실패'란, '또 다른 가능성을 꿈꿀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할머니는 왜 나만 보고 있을까요』는 아기자기하면서도 세련된 책이다. 현재 절판이라 나오던데 아쉬운 일이다. 열심히 소개하다 보면 다시금 독자를 찾아오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이 책은 할머니와 손녀 '이비'가 시내 구경에 나선 어느 하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할머니는 왜 나만 보고 있을까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바로 할머니이다. 너무나 흔해 빠진 선입견일지 모르지만, 보통 이런 스토리의 할머니라면 시골에 계신 보통의 할머니 모습을 연상하게 되지 않을까? 적어도 난 그랬다. 그런데 '이비'의 할머니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굉장히 세련되고 젊은 할머니다. 밝은 초록색 외투에 노란 앵클부츠, 그리고 은회색 머리에 파란 머리핀을 꽂고 손녀와 외출을 나서는 멋쟁이다. 뿐만 아니라 가게가 즐비한 시내, 박물관, 공원까지 나들이 코스도 상당히 감각적이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띈 건, 밝고 차분한 분홍색이다.

대부분의 책이 그러하듯 안쪽 표지(inner cover)에서부터 힌트를 주고 있다. 평소 분홍색을 딱히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이 색은 참 마음에 들었다. 책에서 이 분홍색은 '이비'의 옷 색깔로 사용된다. 그림책 내에서 '이비'의 분홍색 옷은 포인트가 되고 있는데, 거기에 더해 본문의 한 문장마다 분홍색 옷을 입고 있다. 이런 소소한 곁들임이 마음을 끈다.



세련된 그림과 훈훈한 이야기, 다양한 풍경은 열 세 장 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의 책임에도 굉장히 풍성하게 느껴진다. 갖가지 모습의 사람들, 주변의 동물들, 도시의 여러 이미지들이 멋진 색과 조화를 이루며 독자를 한껏 취하게 만든다. 정말이지 할머니와 '이비'와 함께 나들이를 다녀온 느낌이다. 집에 도착한 할머니와 '이비'는 동생과 고양이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런데, 잠깐! 아가의 얼굴색이 상당히 짙다. 그러고 보니 '이비'의 얼굴도 갈색이다.

무심히 지나쳤던 부분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할 때가 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이비'의 얼굴색을 마지막 부분에 와서야 알아차렸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각자의 다름을 보여주고 있는 작가의 태도가 좋았다. 이런 작가의 생각은 '이비'의 말을 통해서도 전달된다.





집에서 할머니가 물었어요.

"이비, 오늘 시내에서 무엇을 보았니?"


"커다란 사람들이랑 엄청 많은 발과 다리를 봤어요. 깃발이랑 인형 사람들이랑 옷을 입은 강아지도 봤어요. 아, 내 이름에 들어간 글자도 봤어요."

"그중에 무엇이 가장 좋았니?" 할머니가 물었어요.

"나는 사람들의 숲이 제일 좋았어요. 사람 나무들은 모두 다르게 생겼어요!"





책은 착실히 어린 '이비'의 시선을 따라 흐른다.

그러다 마지막에 가서 툭, 하니 또 하나의 시선을 꺼내든다.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앞으로 넘겨 미처 보지 못했던 또 하나의 시선을 확인하려 들 것이다.

이 드러나지 않았던 시선이 나는 최선의 실패라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책의 제목이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리라. 이건 모두가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Book. 『할머니는 왜 나만 보고 있을까요』, 밀랴 프라흐만 글 · 그림, 최진영 옮김, 나무생각, 2017.

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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