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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Jan 01. 2021

나의 나팔꽃 이야기

2020년 나는 나팔꽃에 푹 빠졌다.




아침이면 집에서 어린이대공원역으로 가는 길, 소방서 근처에서 핀 나팔꽃을 처음 본 날부터였다. 몇 송이가 작은 나무 안에 숨듯 피었는데 그게 눈에 보인 것은 나에게 참 고마운 일이었다. 스쳐갈 수도 있는 것을 발견해내는 마음이 나에게 있다는 것, 그런 것이 나를 안심시켰고 기쁘게 했다. 나팔꽃은 그 마음의 존재를 확인하게 해주는 고마운 꽃이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서 다시 나팔꽃을 찾아보기도 했다. 나팔꽃은 이른 아침 피고 오후부터는 꽃잎을 접기 때문에 밤에는, 특히 잘 안 보이는 곳에서 피는 경우에는 찾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도 아침에 본 그 위치를 잘 기억해두면 되니까. 저녁에 나팔꽃을 보고 나면 하루를 무사히 지나온 나팔꽃에게, 그리고 나에게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처음 발견했던 그 나팔꽃은 며칠 뒤 세상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길가의 작은 나무들이 너무 우거져서 정리되던 중 함께 사라졌다. 그날 아침 지하철에서 나는 이런 메모를 휴대폰에 적었다.


이제 더이상 '그 나팔꽃'은 없다. 그 자리에 있던 그 나팔꽃. 슬프고 조금 눈물도 난다. 도로를 정비하면서 사라진, 어젯밤 그제의 밤 아침까지 4일을 나와 함께 한 꽃. 슬프다. 그 자리에서 사진을 많이 남겨두길 잘했다. 사진 찍는 시간보다 더 오래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봐두길 잘했다. 그렇게 생각이 들지만 그건 그거,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충분하지 못해서 슬프다. 너무 빨리, 인사도 준비도 없이 갔다. 계절이 지나서 가야할 때여서 가는 것도 슬픈 일인데, 그게 아닌 채로 간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매일 아침 익숙하게 피던 꽃도, 그 옆의 아직 봉오리이던 꽃도, 하루 아침에 사라졌다. 슬프다. 그 자리에 그 꽃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싶다. 기억해야지. 애쓰고 힘써서 꼭.


앞서 말한 그곳과 다른 위치에서 만난 나팔꽃 이야기도 해야지. 집에서 소방서 근처까지 가기 전, 골목 어느 집 마당 앞. 사진에서처럼 자라고 있었다. 꼭꼭 숨은 것처럼, 낮은 곳에서 핀 나팔꽃과 다르게 이 나팔꽃은 눈에 들어오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색도 얼마나 짙은지.


처음 본 날에는 그 꽃을 보고 있는 지금을 감탄했고 며칠이 지나면서는 앞으로를 슬퍼했다. 이 꽃을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지 몰라. 가을이 깊어가니까 계절을 타고 이 꽃도 떠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지만, 하루 아침에 '쓸려가버린' 이전의 나팔꽃을 떠올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꽃은 언제든 질 수 있고 언젠가는 진다고, 슬픔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 했다. 내일 아침엔 나팔꽃을 못 보게 되더라도 오늘 충분히 보자고, 그거면 된다고 여겼다.


한 송이 한 송이 공들여 보는 날이 길어졌다. 그 말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여긴 날로부터도 꽤 오래 나팔꽃이 피어있었다는 것이다. 내 마지막 인사를 먹고 자란 걸지도 모르지.


9월 25일 아침 출근길에도 여지없이 나팔꽃과 시간을 보내려는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있는 게 더 예뻐요." 마당 안에서 그 집 주인이 나에게 한 말이었다. 그 사람이 나의 영역에 들어온 건 그날이 처음이었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 나팔꽃을 보고 있노라면 그 사람은 마당을 정리하거나 마당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꽃을 봤다. 실은 몇 번 들어가서 본 적이 있다. 마당이라고는 하지만 뒤로 난 길로 외부 큰 도로와 연결되고 있어서 누군가 들어오고 나간다는 느낌보다는 지나간다는 느낌이 조금 더 컸다. 조심스럽지만 들어가서 잠깐씩 보고 나오고는 했다.


"그림 그리는 분이세요?" "아, 그냥 예뻐서요." 멋쩍게 웃었다. 그냥 예쁘다는 말은 더할 단어도 뺄 단어도 없는, 담백한 사실이었다. "봐도 봐도 안 질리죠?" "네, 매일 봐도 예뻐요." 이 다음 말이 또 있었다. "처음에는 뽑으려고 했는데 저도 예뻐서 뒀어요." 고맙다고 했다.


그 뒤로도 나는 매일 아침 나팔꽃을 보려 그 집 앞에서 멈추었고 몇 번 더 그 사람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가을이 더 깊어갔다. 나팔꽃도 이제 눈에 띄게 그 수가 줄거나 잎부터 말라 갔다. 마당 안 작은 단풍나무 주변으로 피던 나팔꽃 먼저 주인이 걷어내었다. 걷어내도 이듬해 여름이면 다시 그 자리에 피어난다고 한다.


위 사진에서 본 그 자리의 나팔꽃은 가장 늦게까지 걷히지 않고 남아 있었다. 주인이 사실상 초겨울이 되도록, 걷지 않고 두었다. 나를 위해서였다. 나는 그 덕분에 나팔꽃과 충분히 시간을 둔 채 헤어짐을 맞을 수 있었다. 공기가 많이 차지는데도 비록 크기는 전보다 작지만 벽돌 틈에서, 가려진 바닥에서 나팔꽃은 피어났다. 겨우내 그곳을 지날 때마다 거기에 이제 없는 나팔꽃의 여름과 마지막을 떠올린다. 고마웠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면 힘이 뭉근히 올라오는 것 같아 좋다.


이 책 사진은 '그 집 앞' 나팔꽃과 함께 찍고 싶었다.

서울 연희동의 #책방사춘기 에서 지난 10월, 나팔꽃 전시가 열렸다. 이장미 작가의 그림책 #달에간나팔꽃 , 책 속의 그림이 완성되기까지의 습작들, 작가가 10년 넘게 직접 기르면서 모은 나팔꽃 씨앗이 책방을 가득 채웠다.


소개에 따르면 이장미 작가는 어느해 여름, 나팔꽃에 '반하게' 되었다. 이후 꾸준히 나팔꽃을 심었다. 나팔꽃이 만들어준 씨앗들을 해마다 분류해 모아두기도 했다. 그리고 책을 썼다. 책에서 나팔꽃은 달에 가고 싶어졌고 달에 가기로 다짐했고, 마침내 달에 간다.


대부분의 그림책들이 그렇듯 플롯은 단순하다. 하지만 한 장을 넘기기가 다른 그림책들처럼, 쉽지 않다. 적은 글자에, 장면 하나에 의미, 경험, 감정, 삶이 무겁도록 저릿하게 담겨 있어서다. 책 속의 나팔꽃은 꿋꿋한 존재였다. 무언가를 원하고 바란다.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희망한다. 희망하는 것이 무색하지 않도록 하루하루, 살아낸다. 꿋꿋이. 그런 존재들은 언제나 내 눈물샘임을 고백한다.


그날 책방의 한쪽 벽에는 보름달들이 떠있었다. 누구나 보름달 종이에 소원을 적을 수 있었다. 소원을 적고 나면, 자신에게 의미 있던 연도가 적힌 봉투를 선물처럼 가져갈 수 있었다. 그 봉투에는 작가가 직접 모든 그 해의 나팔꽃 씨앗이 담겼다. 해마다 꼼꼼히 모아온 씨앗을,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마지막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씨앗을 사람들과 나누는 사람. 나팔꽃 같은 그 마음. 그날 내가 적은 소원은 이것이어서 나는 더 감사했다.


'지향과 목표가 늘 함께 하는 가운데 내가 내 삶에서 늘 봄직한 것은 그 결과가 아닌, 딛는 길에 만나는 나팔꽃과 같은 것이기를, 그를 알아보는 눈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땅과 가까운 곳에서 피는 나팔꽃, 주변의 무언가를 타고 올라가 피는 나팔꽃. 피는 곳의 높이는 조금씩 달라도 나팔꽃이라는 꽃은, 이를테면 벚꽃이나 개나리 같은 꽃과는 어딘지 다르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세밀히 걸어야 보이는 꽃이고, 사람 시선 정도 높이에서 피더라도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꽃. 심상한 꽃이다. 심상치 않다는 말은 놀라운 찰나를, 심상하다는 것은 뭉근한 영원을 가리킨다. 보고 있자면 아프게 짜릿하지 않아서 매일 봐도, 아니 매일 볼수록 더 좋은 꽃이다. 이 꽃의 여운은 그 덩굴 줄기처럼 깊고, 그 꽃잎의 쪽빛 색처럼 짙다.

      

나팔꽃은 덩굴이어서 꽃 한 송이만 덩그러니 피어있는 경우는 잘 없다. 아무리 땅 낮은 곳에서 작게 핀 나팔꽃이어도 그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나팔꽃이 있다. 그건 비교적 눈에 잘 띄는 곳에 핀 나팔꽃도 마찬가지.      


어느 날 아침 9시쯤 활짝 핀 나팔꽃을 보았어도 다음날 같은 시각 그 나팔꽃은 잎을 오므리고 있을 수 있다. 대신, 그 옆의 다른 나팔꽃이 핀 것을 보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나팔꽃은 이른 아침 피었다가 낮이 깊어 가면 잎을 접고 밤이면 잘 자고, 다시 새벽녘 피어난다는 것. 그 일을 꾸준히, 부지런히, 묵묵히 한다는 것.     


나팔꽃에서 누군가 생명력을 느낀다면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때 되면 때 맞춰 피어나고 다시 때 되면 때 맞춰 잎을 접기 때문일 수 있다. 고운 색 꽃잎이 판판히, 널찍이 핀 그 형태 자체 때문일 수 있다. 무언가에 기대어서일지라도 불필요한 부끄러움이라고는 없이 자신의 줄기를 키워내기 때문일 수 있다. 어딘가를 향해 뻗어내는 긴 줄기 다발들, 그 위에서 듬성하지만 결국 연결되어 있는 봉오리들 때문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나팔꽃이라는 ‘종’은 줄기도, 꽃받침도, 꽃잎도, 꽃봉오리도 생명을 품은 주인이다. 생명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이 꽃.


2021년 나는 또 다시 나팔꽃에 푹 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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