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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안 Feb 21. 2021

믹스 커피 뜯는 법

거의 다 왔을 때쯤, 비가 어물쩍 내리기 시작했다. 아빠와 내가 먼저 입구 어귀에서 내리고 엄마와 동생은 주차를 하러 갔다. 아빠와 걸으며 양 옆, 앞 뒤를 살폈다. 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종류와 수량의 해산물이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놀란다.


"이렇게 많이 잡아서 갖다 놨다가 안 팔리면 우야노." 그럴싸한 생물 다양성 훼손에 대한 걱정 더하기 많이 못 팔아서 근심할 사람들에 대한 걱정. 걱정도 팔자.


"와 안 팔리노. 다 팔린다. 오늘 비 와서 그런가 사람 이 정도면 없는 거다." 역시, 죽도시장 죽돌..이다우신 말씀.


들어선 입구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전복집 앞에 섰다. 작은 전복은 많이, 큰 전복은 조금 적게 담기는데 그렇게 해서 한 소쿠리 당 5만원 정도 하는 것 같다. 소쿠리라고 안 하고 싶은데, 접시는 아니고 그릇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야도 아닌 이걸 소쿠리라고밖에 하지 못하는 나를 탓한다.


상차림비만 내면 직접 사간 해산물이나 회를 바로 먹을 수 있는 횟집으로 갈 거라 통째 포장 아닌 손질 포장을 부탁했다. 호스로 전복을 씻고 내장은 따로 분리하고 다시 씻고, 그렇게 포장까지는 시간이 적잖이 걸린다.


아빠는 고등어를 좀 보러 가고 나는 거기 서서 기다렸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살짝 돌리니 갈치부터 시작해서 생선 이것저것을 파는 다른 가게이자 좌판이 보였다.


목욕탕 의자 같은 것에 앉아 생선을 손질하던 분이 한쪽에서 맥심 믹스 커피 두 개를 꺼내들었다. 노란색 겉포장에 설탕 조절 부분이 초록색인 그 맥심 믹스 커피.


툭. 들고 있던 생선 손질용 큰 칼로 믹스 커피 두 개의 입구를 내려쳤다. 생선 손질하는 도마 위였다. 깔끔하게 CUT! 된 커피 믹스 두 개를 한 종이컵에 부었는지 두 개의 종이컵에 나눠 부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보고도 기억을 못하는 걸 수도 있다.


손으로 뜯거나 가위로 자르거나, 믹스 커피 뜯는 법이 그뿐인 줄 알았다면 이제 새롭게 하나를 더하게 된 것이다. 삶은 이토록 구체적이다.


그냥 그렇다. 더 쓰면 동정 아니면 규정이 된다.


그런데도 굳이, 또 굳이, 한 마디만 더 써도 될까. 별건 아닌데. 삶을 들여다 보면 대충 눙칠 수 없는 구체적인 가나다, ABC가 가득하고 다른 사람의 삶 또한 그렇다. 나는 나와 누군가들의 그 구체적인 삶을 촘촘하게, 다만 힘은 안 준 채로 들여다 보며 살고 싶다. 정말이다.


아, 이날 아빠는 참 기분이 좋았다. 좀체 대구 본가를 내려가지 않는 편인 내가 1월 중순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서 외로워 하는 아빠를 생각해, 장례식 이후 일주일 만에 다시 집으로 내려간 날이었다.


함께 오랜만에 포항 죽도시장에 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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