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는 열심히 살았지만
부도가 났다.
버티다 버티다 결국 부도가 났고
사무실은 문을 닫았다.
우리 네 식구가 달라진 것은
그렇게 엄마 따로 아빠 따로 일을 하게 되었고
나는 여전히 동생 육아를 했다.
가세가 기울어져 거의 다 쓰러졌을 때
엄마는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온갖 일을 다했다.
남의 집 일도 해보고 노상에서 장사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젊고 예쁜 엄마가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지금의 내가 그때의 엄마라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노상에서 일할 때는
학교를 끝나면 동생 손을 잡고 마을버스를 타고
엄마가 있는 곳에 갔다.
아빠와 사무실을 갔었을 때는
학교에 다녀오면 늦은 밤까지
엄마가 늘 없었는데
이제 내가 찾아갈 수 있는 곳에 엄마가 있는다는 것이
너무 진짜 너무 행복했다.
엄마가 있는 동네는 아파트가 많이 있었는데
동생은 그곳의 놀이터 가는 재미에
나에게 엄마한테 가자고 했다.
우리 집은 다세대주택이었으니
놀이터는 꿈도 못 꿀 때였다.
동생을 그네에 앉히면,
"뉴나 ~ 쎄~게 쎄~~~ 게 밀어뎌~"
나는 있는 힘껏 밀어준다.
동생의 발이 하늘 구름에 닿길 바라며!
잘 놀고 있는데 아이들 무리가 와서는
"너네 여기 안 살지? 비켜~ 그네에서 내려"
하며 텃세를 부린다.
우리가 안 사는 걸 알 수밖에 없는 게
엄마가 그 아파트 앞에서 떡볶이를 팔았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왜 비켜야는데? 내 동생 타고 너 네타!"
"거지냐? 너네~~"
그 소리에 그 아이 면상을 긁어버리고 싶었지만
엄마는 싸우는 걸 싫어하니까 꾹 참고
동생을 안고 터벅터벅
언덕길을 내려와 엄마에게 갔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말을 잘 듣는 딸이었다. 세상이 뜻대로 안 되는 엄마에게
유일하게 뜻대로 잘 크는
키우기 어렵지 않은 딸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 동네는 유독 텃세가 심했고
엄마도 견디다 못해 다른 곳으로 옮겼다.
더 깊숙이 아파트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그냥 허허벌판.
그곳에는 공사하는 곳이 있어
칼국수를 팔게 되었다.
역시나 버스를 타고 동생과 엄마를 찾아간다.
아무도 우리에게 텃세를 부리지 않는 곳.
엄마와 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있을 수 있는 곳.
가는 길이 얼마나 설레었는지,,
지금도 그때의 시간 공기 냄새도 기억이 날 정도이다.
마을버스 제일 마지막 정류장.
버스는 멈추자마자 흙먼지를 뿌옇게 뿜어대는 사이로
저 멀리.
봄꽃 같은 어린 엄마의 얼굴에
그늘이 하나 가득 져
엄마는 아직도 한파가 몰아친 차디찬 겨울 같았다.
"엄마! 우리 왔어!"
"여기까지 뭐 하러 와~집에 있지~"
리어카 밑에 신문지를 펴고
동생과 나는 앉아
엄마가 끓여준 칼국수를 먹었다.
"칼국수 정말 맛있어."
우리의 입은 진득한 칼국수로 즐거 웠지만
엄마를 깊게 파고든 절망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