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의 초단편소설
모자를 벗으니 솔바람에 머리가 씻겨지듯 개운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땀에 젖어 모자에 눌린 머리칼이 쳐져 있었다. 손가락을 펴 머리카락을 훑는다. 젖은 머리칼이 손끝을 닿았다. 지훈이 머리카락을 잡아 올려주며 바람이 닿는 면적을 넓혀 주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자신의 입김을 불어 머리카락이 땀에 달라붙지 않게 해 주었다.
"시원해. 고마워."
현아는 그렇게 말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지훈의 일상 같은 세심함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원망의 마음도 조금 있었다.
"고마워. 그만해도 돼. 근데 좀 슬프네."
"왜?"
"그냥, 이렇게 해 줘서 너무 시원한데...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지금 좋아?"
"응, 좋지."
"그럼 됐어. 지금 좋으면 됐지 뭐."
늘 지훈은 다정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아는지 누구에게나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아는 그런 지훈이 불만이었다. 언제나 달콤했으나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호의로 왔다. 함께하는 동안 그 모습이 지훈의 성향이라는 걸 알았고 바꿀 수 없는 천성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지훈은 현아가 집을 나가는 순간에도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 그럼. 네가 싫다는 데 내가 어떡하겠니. 네가 행복하지 않다는데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어. 네가 간다는데 내가 잡는다고 너 여기 것도 아니고."
지훈은 언제나 항상심을 유지하는 그런 태도였고 현아 역시 그런 지훈을 알기 때문에 헤어지자는 얘기를 쉽게 꺼내진 않았다. 잡아달라는 뉘앙스의 투정도 아니었다. 현아의 오랜 결정에 지훈이 쉽게 동의하고 그렇게 헤어졌다.
현아는 머리카락을 들추며 바람을 불어주는 지훈의 입김에 잠시 예전 생각이 나 울컥거렸다. 지훈과는 오랜 시간 동거를 했다. 지훈은 서울로 올라와 자취를 했다. 나름 지역에서 공부를 잘해 대학을 올 때 학교며 동네며 시내 곳곳에 현수막이 걸렸다고 했다. 반면 현아는 서울 토박이였다. 서울 밖으로는 수학여행과 동아리 여행을 제외하고 가 보지 못했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 덕에 그 흔한 가족여행 한 번 가보지 못했다. 부모님은 그저 일하고 현아는 본분에 맞게 공부할 뿐이었다. 현아는 원하는 대학에 갔고 지훈과는 연합동아리 '별천지'에서 처음 만났다. 지훈은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현아는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도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별을 지훈은 지겹게 봤다고 했다. 공부하다 잘 안 풀릴 때 슬리퍼를 끌고 집 밖으로 나가면 별자리를 몰라도 오작교가 뭔지 알 것 같이 많다고 했다. 그때 태우는 담배 한 모금이 자신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지만 저 별들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도시의 화려한 불빛이었면 좋겠다고 했다. 현아는 수학여행으로 간 제주도에서 쏟아지는 별을 봤다고 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별을 본 적이 처음이라 그 순간 시골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가족과는 한 울타리 안에 있다 뿐이지 얼굴 볼 시간도 대화할 시간도 없다고 했다. 시간이 맞아 함께 밥을 먹을 때는 가족 모두 접시에 얼굴을 박을 정도로 밥 먹는데만 열중했다고 했다. 도시를 열망하는 시골 남자와 시골을 동경하는 도시 여자가 '별천지'에서 만났다. 그들의 만남은 극과 극에 서 있었지만 서로를 갈망하며 바라보고 서 있었기에 n극과 s극이 서로 끓어 당기듯 자연스러웠다.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처음이었고 하얀 도화지에 그리듯 그들의 첫 경험들은 서로의 세계를 물들이기 충분했다.
지훈의 자취방은 현아의 취향들로 채워지기 시작했고 현아가 취직하고 세 번째 월급을 받는 날 독립을 선언했다. 부모님은 무관심인지 격려인지 모를 지지를 해 주었다. 지훈의 원룸 전세금으로 보증금을 넣고 현아의 월급으로 월세를 지불하기로 하고 작은 투룸으로 이사를 했다. 둘이 있는 시간만큼 공유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났다. 함께 먹고 자고 하는 흔한 일상 외에도 여행을 가고 때로는 가지 못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낯선 여행지에서 새벽 공기 마시며 산책하는 순간은 온 우주에 오직 둘만 있는 것 같은 온전한 기분이 들었다. 여행은 그들에게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별이 비로소 이어진 걸 느낄 수 있게 하는 시간이었다. 이 끈이 끊어졌다는 걸 느낀 건 현아가 서른이 되는 해였다.
다정하고 사근한 지훈의 천성은 그의 주변을 밝게 했고 현아가 아니더라도 늘 누군가가 있었다. 반면 현아의 냉소적인 태도는 주변에서 점점 멀어지게 했다. 서로 돈을 벌면서 서로를 향한 시간을 점차 줄어들었다. 현아는 자신의 가족과 지훈이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 지훈이 별을 보며 느꼈다던 시골의 권태로운 생활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았다.
"우리 헤어져."
"왜? 헤어져?"
"사랑하지 않으니까.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을까?"
"사랑이 뭔데. 그거 추상적인 거야. 의미를 부여하면 부여할수록 멀어지는 거라고."
"예전엔 오빠가 별처럼 빛난다고 생각했어. 근데 지금은 그 빛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누구에게나 다정한 건 예의가 아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헤어지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이미 마음이 다 했는데."
현아는 자신을 바라보는 지훈의 눈빛이 이미 온기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가벼운 권태로움이라면 지나칠 수 있었지만 지훈의 같은 모습, 같은 표정, 같은 말투는 누구에게나 포함되는 것이었다. 현아만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다른 사람도 공유하고 있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원인이 없는 건 아니었다.
별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 서로가 사랑했던 정보를 모두 잃어버렸다. 그냥 '참 좋은 사람이었다.' 정도로만 기억하게 되었을 무렵 간간히 연락하며 지냈다. 어느 날 서로 약속을 하고 만났다. 다시 만난 지훈은 여전히 다정하고 평화로웠다. 예전 그대로 누구에게나 친절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 후로도 몇 번 만나 밥도 먹고 일상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토요일에는 함께 등산을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