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발에 힘이 없고 굳어버린 몸이 바닥으로 그보다 아래로 꺼져가는 것 같았다. 바닥은 조금씩 말랑해져 가고 내 몸은 놓인 딱딱한 나무둥치처럼 느껴졌다. 크림처럼 뭉근한 바닥 위에 놓인 나는 아래로 그보다 더 아래 어두운 곳으로 빙글빙글 유선형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대로 사라져도 괜찮겠다고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잠깐 엎드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보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숨을 크게 쉬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바닥은 디딜 수 있도록 단단해지고, 나는 다시 나로 돌아왔다.
내일과 모레가 없을 것 같은 삶. 끌어낼 수 있는 에너지는 이미 모조리 끌어내 써버렸다. 마치 다음 주 용돈을 미리 받아 써버리고는 당장 그 주에 쓸 용돈이 없어 울어버리는 초등학생 같았다. 정작 필요한 때에 후회스러워 울상을 지을지도 모르는 내일을 외면하는 스스로가 기가 막혀 혀를 차지만, 내일을 배려하기에 현재가 명백히 버거운 것이다.
언제나 경솔하고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거나 신경 쓰이고 싶지 않은 강박이 있고 그 결과 가면 쓰기를 선택했다. 선하고 친절하고 책임감 있는 역할의 가면이었다. 그것 역시 나의 선택이었다. 타인은 나를 신경 쓰거나 나로 인해 괴로운 일은 없어야 했다. 가급적이면 웃었고 즐겁게 행동했다.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으려는 강박과 타인의 행복이 나로 인한 거라면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뿌듯하다는 두 가지 강박이 만나 나를 괴롭게 했다. 사실은 겁쟁이였던 거다. 담대한 마음을 가지지 못해 거절이 아닌 친절을 선택해버린 물렁한 마음이 마치 원래 큰 그릇을 가진 것처럼 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절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무례했다. 그 결과, 타인은 웃었고 나는 가끔 속으로 울었다. 불편한 문제들은 견딜 수 없었지만 가면을 벗은 채 갑자기 달라진 모습을 탓할(지도 모르는) 타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라는 강박이 나를 또다시 힘들게 했다.
그럼에도 가면이 소용없는 누군가도 있었다. 어른이라는 가면 뒤에 울고 있는 아이를 발견해주는 사람들이었다. 숨지 않고 누군가 발견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을 못나고 어린 마음을 발견하고 슬며시 손을 얹어 온기를 더해 불안을 잠재워주는 사람들. 울고 있던 아이를 존귀하게 대해주는 그들이 있어서 견딜 수 있다.
인간은 인간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전능하지 않다.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건 그저 자신 정도이다. 머물러있지 않고 변화하는 인간의 성정이 본질이라면 조금은 담대해지기를 미래의 나에게 바란다. 긍정의 얼굴과 긍정의 말들에서 힘을 얻으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고자 하는 나는 분명 낙관론자다. 내 안으로 부정한 기운이 들어차지 않도록 단단히 마음을 여미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