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잃으라고 있는 줄 알았지 #5
여자는 여자에게만 들리도록 볼륨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
흩어져버린 추억과 조각나버린 마음이 뒤늦게 너를 데려와 마치 손에 닿을 만큼 후회로 물든 순간도 다 버릴 수가 없어서 기억 속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는 나...
피아노 건반 소리로 노래가 시작되었다. 편의점까지는 골목을 벗어나 도로를 따라서 작은 횡단보도를 두 번 건너야 했다. 나지막이 흐르는 노래를 배경 삼아 도로 옆 길가를 따라 걸었다. 골목은 혼자 걷기 좋게 조용하지만 가끔 그 고요함이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그에 반해 도로 옆 길은 조금 덜 낭만적이지만 도로를 바삐 지나는 차 소리에 묻혀 작게 틀어둔 음악이 더욱 미세하게 들리니까 괜찮았다. 하지만 어차피 누가 듣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골목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여자는 가사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특별한 기교 없이 담백한 곡이라 노래를 잘하지 못하는 여자도 시를 읊듯이 따라 부를 수 있었다.
모든 건 다 지금이 밤이기 때문이라고 되뇌면서도 별 것 없는 평범한 일상에 배경음악이 더해지니까 제법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고 여자는 잠깐 생각했다. 생각 많은 여자의 느긋한 발걸음이 노래의 반주와 주파수가 맞추어지듯 겹쳐졌다. 다가오는 가을의 선선함이 아닌 지나버린 여름처럼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후텁한 바람이 불어와 마치 늦여름으로 떠미는 것 같아서인지 아니면 지금 들리는 서정적인 가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자는 자꾸만 시간을 거슬러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횡단보도의 첫 번째 칸을 막 밟으려는 참에 어딘가에서 작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딘가 어미 고양이에게 버림받은 아기 고양이가 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발을 멈추고 서서 음악을 잠깐 끈 채 귀를 기울였지만 소리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잘못 들은 걸까? 몇 초간 기다려봤지만 차 소리만 간간히 들릴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과거로 향하는 줄 알았지만 여자는 확실한 현재의 두 번째 횡단보도를 앞에 두고 있었다. 집에서 편의점까지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길을 잃고 울고 있는 건 고양이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 아닌지는 백 번을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여자는 다시 첫 번째 칸에 발을 올려 횡단보도를 건넜다. 길 건너 편의점 간판의 환한 불빛이 눈에 들어와서 음악을 다시 켜지 못한 채였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자 편의점 앞의 초록색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 누군가 먹다가 치우지 않은 맥주캔이 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으로 출시된 맥주로 여자도 몇 번 사서 마셔보려 했지만 편의점에 올 때마다 매번 그 자리만 비어있어 사지 못했던 맥주였다. 오늘은 보드카 말고 맥주를 마실까? 여자는 편의점 문손잡이를 잡고 입구에 잠깐 멈춰 섰다. 얼음을 살지 맥주를 살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맥주를 사서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면 좋아요를 좀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맥주는 배가 불러서 싫은데...사서 사진만 찍을까? 마시는건 원래대로 보드카 토닉을 마시고...그러다간 저 맥주가 마지막 맥주일 수도 있잖아라는 생각이 들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자신이 어이가 없어 혼자 픽-하고 웃었다.
"저기.. 죄송한데, 들어가실 건가요?"
기척을 못느꼈던 여자는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물러서던 여자의 발이 목소리의 주인인 누군가의 발을 밟을 것 같자 여자는 그만 중심을 잃고 말았다.
{미지근한 매거진}에서 연재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