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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May 03.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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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조각모음 #23 그 아이


"잠깐만"이라며 사라졌던 그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나타나 손을 내밀고 있다.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당황스러움에 몸이 얼어버린 연우의 귀가 빨개졌다. 연우는 그가 내민 손을 바라봤다. 하얗고 긴 그의 손가락, 그 손을 잡고 싶었다. 


이 손을 잡아도 될까? 

여전히 햇살은 연우를 향해 살랑이고 있었다.












교실 창 밖으로는 이미 한 껏 쓸쓸한 냄새를 품은 바람이 낙엽을 몰고 다니는 소리가 스스 들려왔다. 창밖이 소란스러운 것과 반대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실내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누군가 부지런히 넘기는 책장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이어폰으로 라디오를 듣고 있는 누군가가 있어 그 미세한 소리의 떨림까지 들릴만큼. 

복도엔 간헐적으로 감독 선생님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단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본인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근본적인 이유에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이 여럿이었지만 역시 그렇다고 해도 일어나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의 용기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그러니까 굳이 분류하자면 후자에 속하는 유형이었다. 그렇다고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교실의 뒤쪽 자리에 앉아 바깥 운동장 모래의 흙이 구르는 소리라고 듣는 것처럼 숨죽인 채 가. 만. 히 앉아만 있었다. 그저 그렇게 시간을 소모한 채로. 

앞자리 녀석의 푸르스름하게 깎인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시간 말고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라 다 써서 없앨 기세로. 이대로 점점 투명해지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난 못 있겠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안쪽 창가 자리 앞에서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줄? 거기 누구 자리였더라? 그랬다. 누가 어디 앉은 거 따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귀에 들려온 게 밖이 아니라 이 안에 있는 사람이 낸 소리라는 걸, 그것도 꽤 부정적인 말투라는 걸 인지한 몇몇의 얼굴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그쪽으로 향했다. 스스로는 못하지만 누군가 뭔가 소란을 일으키는 걸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옆자리에 있던 다른 얼굴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친구를 올려다보았다.


"나. 먼저 갈게."

라는 말을 던진 채 자리에서 나와 교실 앞쪽 문을 열더니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똑같이 생긴 수십 개의 얼굴들에 실망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뭐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 생기는 줄 알았는데, 별거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책상을 향했다. 

뒤통수에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거둔 그는 그녀가 방금 전 나간 교실 앞문을 바라봤다. 아직 무언가 다 못 나간 걸까? 문이 10센티쯤 열려있었다. 열린 문틈으로 쓸쓸한 냄새를 묻힌 바람이 들어왔다. 그 순간만큼은 다른 차원으로 가는 포탈 같은 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문으로 조용히 나가서는 그 문을 힘주어 꼭 닫았다. 이 포탈은 이제 닫혔어. 

너희들의 일탈은 허락할 수없다는 듯. 이 문으로 나가는 건 내가 마. 지. 막이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빈 의자가 두 개가 되었지만 원래 비어있는 의자였던 것처럼. 아무도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교실은 그런 곳이었다. 



이한은 그 아이가 나갔을 걸로 추정되는 대로에 접해있는 북쪽 현관으로 향했다. 어둠 속의 계단 끝엔 열린 적이 있었을까 싶은 외부 현관으로 향하는 문 두 짝이 야무지게 닫혀있을 뿐이었다. 방금 나간 그 아이가 보이지는 않았다. 

북쪽 입구 문 앞에 선채로 무작정 나오긴 했는데, 이제 어디로 갈까 고민하며 바깥을 향한 시선 끝에 그 아이가 서있는 게 보였다. 운동장 한가운데에 서있는 모습으로. 이유 없이 맥박이 빨라졌다. 

주위에 아무도 없고 건물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에 삼켜지기 직전 운동장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여자 아이. 그 아이는 고개를 들고 방금 전까지 본인이 앉아있던 지금은 비어있을 의자가 담긴 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소리가 나지 않게 신중하게 문을 열었다.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은 그랬다.

그 아이는 곧 몸을 돌려 교문으로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운동화가 모래를 밟는 소리가 어둔 운동장을 울렸다. 이한은 조용히 신속하게 문을 마저 닫고, 소리 나지 않게 운동장 바깥으로 빙 돌아 걸으며 교문으로 향했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쉬운 별 것 아닌 일을 왜 그동안 못했을까 생각하면서 이한은 교문밖으로 빠져나왔다. 골목을 돌아 나와 큰길에 면한 도로를 달려오는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눈부셨다. 눈부신 헤드라이트 불빛을 등진 채 그 아이가 서있었다. 뒤돌아서 이한을 향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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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 미지근한 매거진 }에서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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