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조각모음 #25 아이스크림
어딜 가는 걸까? 내가 따라가는 건 알고 있는 걸까? 그림자를 따라 걷는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이한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러다 문득, 이한은 그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연우.
늘 거기에 있었던 것 마냥 배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사람이 있다. 그 아이처럼.
자리가 창가 쪽 세 번째 기둥 뒤라는 것만으로도 이한과 그녀의 세계가 겹칠 일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이한은 교실 뒤에 앉아 모두의 행동을 살피거나 혹은 아무것도 보지 않거나 하는 역할이었다.
관망하는 것, 그러나 아무런 일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참견하지 않는 것이 그가 가진 역할이었다.
적당히 시간을 맞춰 등교한다. 가끔 지각도 하지만 일부러 일찍 오는 일은 없다. 가끔 선생님께 혼이 나고 대부분은 별 일 없이 지낸다. 무료한 학교생활을 견딜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지내는 게 교실에서의 그의 역할이다. 누구도 시킨 적은 없지만 교실이라는 사회는 묘하게 그렇다. 학기 초에 각자에게는 일정한 캐릭터가 주어지고 각자의 영역이 정해진다. 큰 틀이 크게 깨지는 법은 없다.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교실이라는 작은 사회가 가진 뻔하지만 고전적인 룰.
이한의 눈에는 그녀가 그보다 조금 더 지루해 보인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정시에 등교하고 지각도 하지 않는다. 지각은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이다. 일정한 시간에 학교에 도착하고 교실에 조용히 앉아 몇몇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수업을 듣는다. 오전 수업을 마치면 점심시간이다. 역시 비슷한 소수의 친구들과 점심을 먹는다. 가끔 쉬는 시간에 매점을 가기도 한다. 성실하게 본인의 간식값을 챙겨 들고서 말이다.
수업을 연이어 듣다가 야간 자율학습을 한다.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간다. 학교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찾지 않고 당연히 그녀도 특별히 누군가를 찾진 않는다. 주어진 일정을 소화하고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낸다. 줄을 서도 옆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얌전히 서있는 게 그녀에게 부여된 역할이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교실이란 사회에는 여러 가지 캐릭터가 있다. 각자의 세계를 껴안은 원들은 때로 겹쳐지기도 하고 서로 밀어내기도 하지만 그 아이의 세계와는 맞닿아본 적조차 없었다. 그저 같은 학년 같은 반으로 이름 적힌 상자에 담겨있는 크기도 색도 무게도 똑같이 생긴 하얀 탁구공일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열린 문을 포털 삼아 통통 튕겨져 나간 두 개의 다른 공이 탁.. 부딪히고 있었다.
"연우?"
소리 내어 그 이름을 말하고 나니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후회라는 파도가 잠깐 밀려왔다.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학교에서는 꽤 멀리까지 와있었다. 잰걸음으로 앞만 보고 걷던 연우가 그 자리에 멈췄다.
아. 들었나.
"아이스크림 먹을래?"
편의점의 푸른 불빛이 그 아이의 얼굴로 쏟아졌다. 동그란 갈색의 눈동자 두 개와 이한의 눈이 마주쳤다. 똑바로 서서 야무진 표정으로. 뭐야.. 시선을 피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사주게?"
"야. 내가 여기까지 데려와줬으면 니가 쏴야지."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굴 데려왔는데?"
"나 따라온 거잖아. 아까부터."
이한이 대답을 못하는 사이 아님 말고 라며 혼잣말을 하더니 연우는 편의점 아이스크림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꺼냈다.
잠시 후 편의점 문이 딸랑 소리를 내며 열리고 연우가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1+1. 너처럼."
"뭐래."
"맞는데, 땡땡이 1+1. 여튼 받아 이거."
아이스크림을 받아드는 이한의 눈 속에 연우라는 동그란 원이, 무채색이었던 원이 조금씩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한을 올려다보는 갈색 눈과 아이스크림을 먹느라 오물오물 거리는 입과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작은 손에 색이 물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쩐지 따뜻한 바람이 곁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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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 미지근한 매거진 }에서 연재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