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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Sep 13. 2022

ep.41 : 애프터 명절



선천적 내향인인 나에게 명절은 온갖 감정이 뒤범벅되기에 조금 힘들다. 시간이 약인 것들이 있고, 때론 그게 답이 아닌 것들도 있다. 어쨌든 간에 명절은 잘 보냈다.



이번 추석에 결혼 소식을 전한 언니가 있었다. 나이가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는 청첩장을 주며 쑥스러워했다. 간단한 티타임을 예상하고 만났는데 밤 12시가 되어서야 헤어졌다. 

결혼 소식을 전하는 새 신부와 따끈따끈한 명절에피소드가 가득한 1n년차 유부녀 사이엔 나눌 대화가 많다. 하지만 이제 그런 명절을 여러번 보내게 될 언니의 명절 후기요청에는체에 거른 말들로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직접 겪어봐야지 케바케니까. 

생각이 많은 나는 언니에게 축하한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기분이 바닥을 칠 때에 누구든 무엇이든 결실을 이루는 소식을 들어서 내 마음이 덩달아 조금 들떴기 때문이다.



연휴 마지막 날이자 대체 공휴일이었던 월요일이 되었다. 

아무도 없는 회사에서 조용히 밀린 업무를 처리하며 고요함을 즐기러 느지막이 출근을 했는데, 저녁 퇴근길에 당근 거래 약속이 있어서 조금 부지런히 퇴근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내내 하늘이 진한 오렌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운전 중이라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아쉬움이 남네.


거래물품은 여행용 캐리어. 좋아하는 브랜드가 1+1 할 때 구매한 28인치 캐리어 두 개는 구입과 동시에 코시국을 만나 단 한 번도 사용되지 못했다. 부피가 워낙 크다보니 내 차로 가져다 주기로 한 것이다. 

거래 상대와 만나기로한 아파트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까지 와줘서 고맙고 죄송하다며, 민트색 봉투에 담긴 현금과 함께 선물로 록시땅의 핸드크림 세트를 함께 주셨다. 

따뜻한 후기를 보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래였다. 온도가 조금 올라가겠구나.



집에 오는 길에는 반찬을 픽업하라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집에 들러보니 엄마는 이미 다이소에서 사왔다는 포리백에 김치와 반찬 몇 종류를 담아두었다. 

밥 먹고갈래? 하시기에 응. 이라고 말하고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가만히 앉아서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기다릴때면 편안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뒤섞인다. 그래도 역시 엄마가 있어서 다행이다. 



반찬을 챙겨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반찬을 차곡차곡 넣는다. 고양이 털이 날리니 바닥 청소를 조금 하고 고양이 밥을 주었다. 남편은 명절의 끝과 함께 이미 출장지로 떠났다. 본가에서 밥도 먹고 온 덕에 시간이 남는 기분이 들어 내 작업방 청소를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지난 명절에 대해 되짚어보며 생각이 많아져 가슴속에서 불길이 치솟을 것 같아서. 다운되는 기분을 털어내기엔 청소만한 것이 없다. 정리만큼은 내가 통제가능한 영역이니까.


청소하러 들어간 작업방 안에는 곧 이사갈 집처럼 상자들이 그득하다. 큰 상자를 열고 그 안에 있는 중간 크기의 상자를 열어 작은 상자를 꺼내고 그 안에 담긴 것들을 정리한다. 

상자에서 나온 물건들을 눈으로 확인하고 분류한다. 물건을 보며 혼자 잠시 추억을 떠올리는 시간을 가진 뒤 다시 상자에 넣거나 당근 매물로 분류하거나 쓰레기로 처분한다. 미니멀해지기 위한 의식을 반복해서 치른다.

그런 뒤 상자를 옮긴다. 정리한다면서 그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치우기만 하는거냐고 남편이 했던 말이 생각이 나서 혼자 웃는다. 아니 나는 위로도 쌓아올리는 걸? 상자 개수는 줄어들지 않지만, 내용물은 꽤 많이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쓰레기봉투가 가득 찰수록 내 방이 한 평씩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단지 기분 탓은 아닐 거야. 50리터 봉투가 하나 가득 나왔는 걸.


땀 흘리며 청소를 하면 머릿속을 비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점심에 먹은 커피와 에그 샌드위치도 맛있었고, 당근 거래도 따뜻했고(약간의 수입도 생겼다.) 청소를 해서인지 기분도 괜찮은 좋은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절은 끝났고.


역시 내 경우엔 몸을 쓰는 활동이 정신을 맑게 하는 것 같다. 어쩌면 결국은 하지 않을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하며 나에게 조금 더 집중하기로 한다. 이제 나를 조금 더 챙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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