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나 이제 22살이야.”
김가은 씨(24)의 자신 있는 한마디에 기가 찼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대학을 2년 꿇었다는 말인가 했다. 들어보니 정부가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지금의 나이 계산법 대신 전세계가 사용한는 만 나이를 쓰는 법을 추진한단다. 찾아보니 진짜였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그놈의 글로벌 시대. 20평이라는 말을 놔두고 굳이 66.1157 제곱미터라고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새롭게 가지게 될 내 나이를 계산해보니 반대였던 마음은 찬성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2살은 어려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숫자만 바뀌는 건데도 지나갔던 청춘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법이 통과되면 한동안은 혼란스럽겠지. 29살이라고 소개받고 나왔는데 알고 보니 31살이었다는 식의 썰들이 인터넷에 돌아다닐 일이 상상됐다.
별 걸 다 생각하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우리 반 애들이 떠올랐다. 계산해보니 초등학교 3학년은 8~9살이 된다. 맙소사. 나이가 한 자릿수다. 이 아이들이 태어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자 웃음이 났다. 귀여워서가 아니고 허탈해서다. 이 애송이들에게 매일 농락당하며 살아가는 현실을 되짚어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아이들이 나를 화나게 만드는 대표적인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부정적인 말로 평가하기다. 기껏 몇 시간 동안 수업을 짜왔더니 재미없어요, 싫어요, 따위의 말로 한 줄 평을 해버린다. 몇 글자만으로 사람 기분을 이렇게 더럽게 만들 수 있다니 놀라운 효율성이다.
다른 하나는 돌아가면서 10초 간격으로 똑같은 질문하기다. 얘들아, 다 그렸으면 색칠하라고. 지금까지 내가 색칠 못하게 한 적 있었니. 그만 물어보고 칠판을 보란 말이야. 다 한 사람은 색칠하기, 저기 써 있잖아. 이 모든 행동들에는 선생님을 화나게 하려는 의도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한다.
수업이 다 끝나갈 때 지금 무슨 과목 하고 있냐고 묻는 아이, 설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질문이 있다며 손드는 아이. 옛날에야 스트레스였지만 요즘은 별 감흥이 없다. 이미 내 마음은 발자국 가득한 회색 눈밭 같은 상태다. 몇 명 더 밟고 지나간다고 해도 티도 안 난다. 새하얀 눈밭이었던 시절에는 발자국 하나에도 눈물이 났었는데. 그때는 그랬다.
내게 첫 발자국을 남긴 사람은 성범이다. 발령이 나기도 전인 기간제 과학 선생님 시절 만난 아이로, 3학년에서 악명 높은 말썽꾸러기였다. 산만하고, 장난기 많고, 선생님 말씀을 안 듣는 것까지는 평범하다. 성범이가 유명세를 얻은 비결은 과격한 폭력성에 있었다. 지금도 성범이를 생각하면 친구의 귀를 거침없이 움켜쥐는 모습이나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대가리를 뽑아버릴 거라고(대체 이런 신선한 표현은 어디서 배웠을까) 외치는 모습이 떠오른다.
성범이는 죽여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르다가도 갑자기 표정을 싹 바꿔 헤실헤실 웃곤 했다. 수줍은 듯이 눈을 내리깔며 웃다가 0.1초 만에 욱해서 다시 험한 말을 내뱉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꼭 변검술을 보는 것 같다. 그 와중에 발표를 할 때면 금방이라도 오줌 쌀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을 비비꼰다. 발표는 부끄러워하면서 친구 대가리는 뽑고 싶어하는 10살이라니. 사람은 참 입체적이다.
보통의 금쪽이들이 그렇듯 성범이도 선생님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실험 중에 장난을 치며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힘든데 친구 귀까지 잡아 뜯어 놓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타일러도 보고 무섭게도 해봤다. 긍정 마인드를 간신히 긁어모아 되도 않는 칭찬도 해줬고 남겨서 혼내기도 했다. 교대에서 배웠던 4년간의 팁들을 모두 써보았으나 현실은 가혹했다. 성범이와의 훈육(이라고 쓰고 선생님의 생쑈라고 읽는다)이 끝나고 나면 진이 빠졌다. 애 앞이라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매번 엉엉 울었다.
나중에 동료 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하자 그 분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셨다.
“성범이 때문에 우는 건 좀 자존심 상하지 않아요?”
당시에는 상처였던 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맞다.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면 그건 10살이 아니다. 성범이 정도의 아이는 반마다 한 명씩 있다. 이 사실을 수많은 성범이들을 만나며 깨달았다. 이제는 학기 첫날 느낌이 오는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할 뿐이다. 올해는 너로구나.
‘올해는 너로구나’는 ‘오늘은 이거구나’로 발전했다. 오늘 같은 경우는 풍선 배구였다. 풍선 배구는 풍선을 손으로 쳐서 상대편 네트로 넘기는 게임이다. 너무 쉬울까 걱정했으나 그만큼 쓸데없는 걱정도 없었다. 아이들은 오늘도 상상을 초월했다. 풍선을 왜 앞으로 보내질 못할까. (풍선 처음 만져보나.) 한 사람이 연속으로 두 번 치면 안 된다는 말은 몇 번을 해야 알아들을까. (시범 보여 줄 때 씩씩하게 대답이나 말든가.)
서브부터 막혀서 게임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서브를 성공해도 한 명이 투터치를 해버리는 바람에 바로 끝.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데 애들은 즐겁다고 방방 뛰고 앉았다. 상상 속에서는 이미 다 때려치우라고 소리 지르고 교실에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어른이다. 이 아이들보다 나이가 2~3배는 많은 어른. 조용히 심호흡을 하고 아이들을 앉힌다. 한 사람이 풍선을 연속으로 두 번을 치면 안 된다고 설명하자 아까 한 얘기 아니냐고 짜증을 내는 목소리가 들린다.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끓어오른다. 그래, 오늘은 이거구나.
집에 가는 아이들의 130cm짜리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그제야 여유와 너그러움이 생긴다. 내가 이 작은 생명체들을 상대로 무슨 추태를 부린 걸까. 정신 차리자고, 어른답게 행동하자고 다짐해본다. 그렇게 되새긴 인내의 미덕은 다음날 ‘오늘 사회 시간에 뭐 해요?’를 일곱 번씩 들으면서 날아간다. (사회 시간이니까 사회를 하겠지) 나는 아직 성숙한 교사는 확실히 아니다. 곧 2살씩 어려질 예정이라서 그렇다. 아무튼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