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하얀 새치가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게 뭐라고 화들짝 놀라서는 잡초 뽑듯 뽑아버렸다. 하지만 새하얀 친구는 다정스레 늘어났고, 결국 새치 염색이라는 분장술을 연마해야 했다.
하지만 눈치없이 검은 머리만 염색약을 잘 먹고 흰머리는 편식이라도 하듯 금세 뱉아내는 것이다. 거울을 볼 때마다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철부지 때문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왜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은 고고하게 염색약을 밀어내는 것일까?
어느 주일이었다. 젊은 시절 완고하기로 소문난 장로님이 특송을 하기 위해 강대상 앞에 섰다. 그분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 별 감흥이 없이 노래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꼭 다문 입 모양에, 말 붙이기 무서울 정도의 근엄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자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완고한 표정은 온데 간데 없고, 마치 갓 글을 배워 책을 읽기 시작한 어린 아이처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음정 박자는 무시한채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소절 한소절 부르는 모습에 적잖게 놀랐다.
심지어 사연없는 눈물마저 핑 돌았는데, 노년에 부르는 노래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싶었다. 나이를 먹는 일이 그리 반갑지만은 나에게 이런 감정은 낯설고 어색한 것이다.
순수의 시절로 돌아가고 있는 그는 더이상 어른이 아닐지도 모른다.
동식물과 사물, 마음까지 모든 처음은 사랑스럽다. 순도 백 프로의 순수한 모습은 목소리가 굵어지면서 각기 다른 종류의 황홀함으로 채워진다. 슬프게도 누구나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시절을 보내지만, 결국 시들어 사라지는 것 외의 다른 사이클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면서 먹은 나이만큼 더 여유롭고 깊어지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어떤 날은 세상 풍파를 다 경험한 지혜의 어른으로, 그러다가도 자신밖에 모르는 고집불통 어른 아이가 되기도 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너그럽다가 유치하기를 반복하겠지.
노인이 되면서 아이 같아 지는 건 출발한 곳으로 다시 스며들기 위한 일종의 준비 같은 게 아닐까. 흰머리가 염색약을 밀어내는 것도 순수의 시절로 돌아가겠다는 나름의 철학 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드문드문 자란 흰 머리카락을 뽑지 않는다. 하나를 뽑으면 두 개가 난다지만 그 이유 때문은 아니다. 물론 염색은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때가 되면 검정 붓 칠을 멈추고 시들어 가는 나의 육체를 느긋하게 바라 볼 것이다.
오늘은 기분도 전환할 겸 화분을 샀다. 가장 만개한 제라늄을 골랐는데, 화분 가게 아저씨는 의아해했다. 대부분 활짝 핀 꽃을 보고 발길을 멈추지만, 정작 사 가는 건 꽃송이가 피지 않은 싱싱한 아이들이라는 거다.
나는 주로 내가 사지 않음 이내 시들어 팔리지 않을 만큼 만개한 꽃을 산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막 지나고 있는 매력적인 장면을 보기 위해서다.
아저씨는 고맙다는 뜻으로 프레지아 한 단을 고르라 했다. 역시나 몽골 몽골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 것 중 가장 많이 핀 다발로 골랐다.
집안 곳곳 서른 개가 넘는 초록이가 있다. 이 중 5년을 함께 보낸 녀석도 있고, 10년이 지난 어른이 화분도 있다. 오늘 신참이 들어왔으니 향기로운 꽃 인사로 복작대겠구나.
나는 유난히도 지는 꽃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꽃은 질 때 가장 짙은 색을 나타내는데, 보라색 꽃은 더 깊은 보라를, 노란 꽃은 더 진한 노란색을 쏟아낸다.
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향기마저 유혹적이다. 마치 절정을 경험한 사람의 심장처럼 말이다.
몇 년 전부터 시든 꽃을 찍는 취미가 있는데, 언젠가 이 사진들을 모아서 사진전을 열고 싶다.
누군가 시들어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떨어지는 심장으로 만나러 와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