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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t yet Oct 09. 2024

우수수 떨어지는,


Falling,


몇 년 전부터 하얀 새치가 하나 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게 뭐라고 화들짝 놀라서는 잡초 뽑듯 뽑아버렸다. 하지만 새하얀 친구는 다정스레 늘어났고, 결국 새치 염색이라는 분장술을 연마해야 했다.


하지만 눈치없이 검은 머리만 염색약을 잘 먹고 흰머리는 편식이라도 하듯 금세 뱉아내는 것이다. 거울을 볼 때마다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철부지 때문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왜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은 고고하게 염색약을 밀어내는 것일까?




Falling time.


어느 주일이었다. 젊은 시절 완고하기로 소문난 장로님이 특송을 하기 위해 강대상 앞에 섰다. 그분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어 별 감흥이 없이 노래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꼭 다문 입 모양에, 말 붙이기 무서울 정도의 근엄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자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완고한 표정은 온데 간데 없고, 마치 갓 글을 배워 책을 읽기 시작한 어린 아이처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음정 박자는 무시한채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소절 한소절 부르는 모습에 적잖게 놀랐다.


심지어 사연없는 눈물마저 핑 돌았는데, 노년에 부르는 노래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싶었다. 나이를 먹는 일이 그리 반갑지만은 나에게 이런 감정은 낯설고 어색한 것이다. 


순수의 시절로 돌아가고 있는 그는 더이상 어른이 아닐지도 모른다.




Falling love.


동식물과 사물, 마음까지 모든 처음은 사랑스럽다. 순도 백 프로의 순수한 모습은 목소리가 굵어지면서 각기 다른 종류의 황홀함으로 채워진다. 슬프게도 누구나 화양연화(花樣年華)의 시절을 보내지만, 결국 시들어 사라지는 것 외의 다른 사이클은 존재하지 않는다.


살면서 먹은 나이만큼 더 여유롭고 깊어지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어떤 날은 세상 풍파를 다 경험한 지혜의 어른으로, 그러다가도 자신밖에 모르는 고집불통 어른 아이가 되기도 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너그럽다가 유치하기를 반복하겠지.



노인이 되면서 아이 같아 지는 건 출발한 곳으로 다시 스며들기 위한 일종의 준비 같은 게 아닐까. 흰머리가 염색약을 밀어내는 것도 순수의 시절로 돌아가겠다는 나름의 철학 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드문드문 자란 흰 머리카락을 뽑지 않는다. 하나를 뽑으면 두 개가 난다지만 그 이유 때문은 아니다. 물론 염색은 당분간 지속되겠지만, 때가 되면 검정 붓 칠을 멈추고 시들어 가는 나의 육체를 느긋하게 바라 볼 것이다.



Falling flowers.


오늘은 기분도 전환할 겸 화분을 샀다. 가장 만개한 제라늄을 골랐는데, 화분 가게 아저씨는 의아해했다. 대부분 활짝 핀 꽃을 보고 발길을 멈추지만, 정작 사 가는 건 꽃송이가 피지 않은 싱싱한 아이들이라는 거다.


나는 주로 내가 사지 않음 이내 시들어 팔리지 않을 만큼 만개한 꽃을 산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막 지나고 있는 매력적인 장면을 보기 위해서다.



아저씨는 고맙다는 뜻으로 프레지아 한 단을 고르라 했다. 역시나 몽골 몽골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 것 중 가장 많이 핀 다발로 골랐다.


집안 곳곳 서른 개가 넘는 초록이가 있다. 이 중 5년을 함께 보낸 녀석도 있고, 10년이 지난 어른이 화분도 있다. 오늘 신참이 들어왔으니 향기로운 꽃 인사로 복작대겠구나.



나는 유난히도 지는 꽃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꽃은 질 때 가장 짙은 색을 나타내는데, 보라색 꽃은 더 깊은 보라를, 노란 꽃은 더 진한 노란색을 쏟아낸다.


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향기마저 유혹적이다. 마치 절정을 경험한 사람의 심장처럼 말이다.



몇 년 전부터 시든 꽃을 찍는 취미가 있는데, 언젠가 이 사진들을 모아서 사진전을 열고 싶다.


누군가 시들어 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떨어지는 심장으로 만나러 와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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