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사람이 한없이 미워질 때가 있다. 여기서 미워진다는 말은 밉다 보다 현재 진행형에 가깝고 실망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보다는 다소 아이 같은 표현이다.
사랑뿐인 사람으로 살면 좋을 텐데 뾰족하게 날을 세우고 부글거리고, 또 끙끙 대며 철들기를 미루는 걸까.
이런 성질머리를 들키기라도 할까 봐 솔직한 사람이라 원래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한다는 연막작전도 펼쳐보지만, 꽤나 번거로운 포장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나의 마음은 자주 고장이 나는데, 삐걱대는 소음들이 술렁술렁 차오를 때면 스위치를 꺼버리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오늘부터 마음공장 파업합니다!"
누군가 때문에 시작된 공장 파업인데, 애꿎은 내 마음만 다독이고 회복하기를 반복한다.
이때 뭐니뭐니 해도 가장 좋은 처방은 머니가 드는 여행이다. 어디론가 떠나는 일은 과열된 마음을 식혀주기에 탁월한 방법이다.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찬 마음에 숨 쉴 공간을 만들고, 낯선 바람을 넣어주는 거다.
오래전 떠난 도쿄 여행에서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는데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날 이후 건축가나 건축물에 관한 책을 찾아보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니멀하고 반듯반듯 차갑게 정제된 작품을 좋아하는데, 덕분에 건축가들은 단순함 속에서도 빛과 바람을 끊임없이 생각한다는 것도 보너스로 알게 되었다. 건물에도 적당한 위로와 쉼을 넣어줄 필요가 있는가 보다.
빛은 넣어주는 것이고, 바람은 흐르고 빼는 게 아닐까. 여행도 삶속에 빛을 채우고, 바람이 지나도록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특히나 혼자 떠난 여행에서 유별나게 빛나는 햇살을 느끼고, 유연하게 흐르는 바람을 만나기도 한다.
겁 없던 시절에는 마음이 조금만 쿰쿰해져도 밤낮없이 훌쩍 떠나곤 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니 현실적인 이유만 늘어놓으며 쉽사리 떠날 수 없게 되더라.
그래서 찾은 대안이 욕조 가득 따뜻한 물을 받아놓고 아로마 오일 몇 방울과 일심동체가 되어 수면 아래 잠겨 있는거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마음속 공간이 비좁아져 빛 한 줌, 바람 한 톨 흐를 수 없게 된다. 손으로 흔들흔들 수면을 일으키면 욕조에서 넘쳐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바람이 지나가듯 느껴진다.
여행 떠나며 면세점에서 향수를 사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 내내 뿌리다 보니 향수의 브랜드와 이름보다 나에게는 '그 도시의 향기'로 기억이 된다.
목욕전 욕실에 좋아하는 향수를 칙칙 두어번 뿌려 놓는다. 향기는 여행의 기억을 소환하고, 가만히 눈을 감고 그날의 햇살을 느끼게 만든다. 물론 눈을 떠보면 노란 형광등 불빛만이 욕실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어쩌면 그것도 잠시의 여행인 거다.
다음으로 가장 가성비 좋은 처방은 온기 가득한 녀석들을 끌어안고 잠들기다. 인형 모양으로 만들어진 온열팩인데, 다 큰 어른이 무슨 인형인가 하겠지만 사용하면 할수록 효과 만점이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자신의 팔로 양쪽 어깨를 안아주면 쉽게 잠든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물론 매일 밤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나에게는 이 방법도 통하진 않았다. 하지만 따뜻하고 몰캉한 아이들을 안고 있으면 마법처럼 스스르 잠이 든다. 사람의 체온 보다야 인간미가 없겠지만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는가? 나를 둘러싼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싫을 만큼 지쳐있을 때 말이다.
처음으로 만난 제품은 그저 단순한 보라색 물주머니였다. 그러다 초코(강아지)와 노랑이(병아리)를 만났다. 그 뒤로 하양이(양), 곰탱이(곰), 밤톨이(곰)와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왼쪽 부터 곰탱이, 노랑이, 밤톨이 순('pocket.'에서도 만날 수 있어요.)
초코와 곰탱이는 곡물이 들어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쓰는 아이들이고, 밤톨이는 함께 일하는 로즈에게 선물한 녀석이다.(내가 받은 게 아니고 선물했다.)
노랑이는 팔은 짧은데 다리가 길어 잠들 때 두 다리를 각 하나씩 잡고 잔다. 곰탱이는 겨드랑이 사이에 넣고 친히 팔베개를 해주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면 엉덩이 밑이나 발 밑 까지 내려가 있다. 녀석은 모험심이 많은 모양이다.
사실 하양이는 덩치 대비 따뜻하지 않아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다. 아마도 수줍은 털복숭이라 온기를 나누지 못한채 자기 안에 간직하는 것 같다.
(사진을 찍어 놓은게 없어서 판매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나의 초코는 전자레인지에 데울 때마다 숭늉 마냥 구수한 탄내가 난다. 하지만 녀석들 중 가장 묵직하고, 언제나 웃상이다. 너무 추운 날 초코를 품에 안고 밖에 나간적이 있는데, 진짜 강아지인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제일 큰 형님 초코('pocket.'에서도 만날 수 있어요.)
일과 사람을 좋아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문제를 끌어안는 성향 때문인지 근원을 알 수 없는 미운 감정이 쌓일 때가 있다. 어깨에 내린 눈 털듯 툭툭 털어내면 될 텐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
가깝던 그녀가, 혹은 사람 좋던 그가 막연히 미워질 때면 낯선 거리를 헤맬 준비를 한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처럼 몸이 힘들면 마음은 대충 자동 정리가 돼버린다.
하지만 떠날 자유마저 없는 날엔 욕조 가득 뜨거운 물을 받아 풍덩, 숨 막히는 열기 속에 갇힌다. 내 안의 답답함은 수증기와 함께 공중으로 사라진다. 구석구석 습기를 먹은 몸은 누굴 미워할 힘 마저 없어져 버린다. 이제 온기 가득한 녀석들을 꼭 끌어안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잠을 청하면 된다. 나지막하게 ‘아, 만사 귀찮아’ 소리가 새어나온다.
당신은 누군가가 미워질 때 혹은 막연히 모든게 싫어질 때 어떻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