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아이는 비와 친하지 않았다. 매일 아침, 집에서 회사 어린이집까지, 지하주차장에서 지하주차장으로 다녔던 탓에, 비를 잘도 피해 다녔다. 평일,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에도, 어린이집에 들어서는 아이의 신발은 뽀송뽀송했다. 그래서 우산도, 장화도 굳이 사줄 필요를 못 느꼈다. 주말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에 부모의 외출 선택지는 지하주차장이 있는, 주차가 편리한 곳이어야 했다.
꼭 그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우리 아이는 몸에 물 닿는 것에 그리도 예민했다. 아침 세수한다고 물이 얼굴에 닿는 찰나, 터져 나오는 비명들. 로션을 바를 때 차가움에 또 싫다고 떼를 쓰는 게 예사였다. 옷이 물에 조금이라도 적셔지면, 축축한 게 싫다고 악다구니를 써댔다.
이게 매일 반복되니 적잖은 스트레스라, 여러 육아 서적들도 읽어보고, 어린이집 선생님들과도 이야기를 나눠보며, 촉감에 예민한 아이들도 있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했더랬다. 나도 물에 몸이 젖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러려니 했다. 아이와 아빠 둘 다 이런 성향이다 보니, 우리 둘은 몇 년 간, 비를 몸으로 직접 마주할 일이 별로 없었다.
긴 시간 제주 여행을 하며, 비를 만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제주 여행을 준비하며, 우리는 우비와 우산을 준비했다. 엄마 아빠 우비는 싸구려 비닐 우비를 챙겼지만, 아이 우비는 특별히 예쁜 분홍색 천사 우비를 준비했다. 우산도 예쁜 분홍색이었다. (우리 집 5세 남자아이의 최애 색은 핑크였다.)
제주에 도착하고 며칠 안 있어, 바로 우비를 개봉할 시기가 왔다. 우비를 장착시키고 우산을 손에 들려줬다. 분홍색 우비를 입고, 등 뒤에 하얀 날개를 바람에 팔락 거리며, 아이가 두 손에 자기 허리만큼 오는 기다란 라이언과 춘식이가 그려진 분홍 우산을 들고, 빙글빙글 돌려댄다. 순간 아빠는 고슴도치가 되었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너무 잘 어울린다. 천사다 천사!”
이에 아이가 호응해, 등뒤 허리춤을 두 손으로 잡고 날개를 파닥 거린다. 정말 천사 같았다. 아이가 금방이라도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주책이었다.
그날은 아내가 집으로 돌아간 날 저녁이었다. 그 전날 아내와 셋이서 찾았던 제주 흑돼지집을 아이와 단둘이 찾았다. 똑같은 음식점 앞. 이때는 셋이었는데 말이지.
아빠와 둘이 온 게 기특했던지, 어린이 전용 서비스라며, 된장국과 김을 받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셋이 배불리 먹었던 양을 똑같이 시켜서, 둘이 거의 다 먹고 나왔다. 이건 꽤 신기한 일이었다.
다 먹고 집에 가려 하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잠시 여기 있으라 말해놓고,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이제부터는 여행 말미까지, 아이와 단둘만 있어야 했기에, 아까부터 긴장이 되던 차였다. 음식점에 잠시 혼자 기다리라고 하는 것조차, 마음이 불안했다.
“여기 잠깐 혼자 있을 수 있지?”
“아빠 우산 가지고 금방 올게! 딴 데 가면 안 돼!”
라는 말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르겠다. 뛰어가는 잠깐 사이, 이게 마치 삼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아이에게 저녁을 배불리 먹이고, 아빠가 홀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진 않을까’
하는 망측한 상상마저 들었다. 뛰어가는 그 잠깐 사이가,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마침내 돌아와, 음식점 계산대 앞에 서있는 아이를 보는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빠의 불안을 감추고자,
“오~ 혼자 잘 있었네! 대단하다~~~”
하며, 괜히 아이를 칭찬해 본다. 아이는 빗속을 걸으면서 연신 재잘거렸다.
“아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우산을 놓칠 것 같아!”
“응, 놓치지 않게 꼭 잡고 걸어와?!!”
그렇게 아이에게 우비를 입히고, 스스로 우산을 들게 한 후 같이 빗길을 걸었다.
보호자가 둘에서 하나가 되자, 아이에게 제공하는 육아 토탈 서비스의 폭이 급격히 좁아졌다. 만약 아내가 있었다면, 아이가 혼자 음식점에서 부모를 기다릴 일은 절대 없었을 거였다. 아내와 아이가 잠깐 기다리는 사이, 내가 차를 가져와서 음식점 문 바로 앞에 세웠겠지. 그리고 장우산 하나를 아내에게 내밀고, 이를 받아 든 아내가 편 우산에 아이가 쏘옥 들어와, 그 잠깐의 새 마저도, 아이는 아기 새처럼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차를 탔을 터였다. 근데 하루아침에, 보호자 둘이 하나가 되었다.
비가 많이 오든 적게 오든, 하루 종일 뛰어놀아서 힘들든 힘이 들지 않든, 아이는 스스로 우산을 들고, 그날따라 특히 쏟아지는 비바람에 힘들게, 아빠와 한밤중 길을 걸어야 했다. 과보호 아빠에게는 이 순간이, 1년이 지난날, 비 오는 오늘, 당시 기억을 다시 글로 들춰볼 만큼,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둘만의 여행을 계획했던 목적이 그랬다.
부모의 케어가 부족해지고, 불완전해지는 속에서,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길 바랐다. 잠깐 아이가 혼자 있는 게 뭐라고, 비 오는 날 우산 혼자 쓰고 걷는 게 뭐라고. 5살 아이가 홀로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는 것은, 그 순간순간이 내겐 기쁨이었다 그래서 이 여행은 철저히, 의도적으로 결핍된 여행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이는 담담했고, 아빠는 매번, ‘불안하다가 안도하고’를 반복했다. 녀석에게 이 경험은, 내가 느끼는 만큼 놀라운 순간은 아닌 듯했다.
지금 가만히, 당시 기억을 떠올려 보고 있자니, 이 여행의 목적은, 아이의 성장을 위함도 있었겠지만, 실은 아이를 통해, ‘부모로서 내가 성장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