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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텀민 May 14. 2023

나의 배경색, blue

우울이라는 친구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보면 인간에게는 '조이'(기쁨), '새드니스'(슬픔), '앵거'(버럭), '디스거스트'(까칠), '피어'(소심)이라는 다섯 가지 감정들이 있다. 이 영화에서 내가 주목했던 건 주인공 라일리가 '슬픔'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이게 되는 성장스토리보다도, 라일리와 엄마, 아빠의 감정 본부에 있는 '감정 리더'가 제각기 다르다는 설정이었다. 라일리의 감정 리더는 기쁨(조이), 아빠는 앵거(버럭이), 엄마는 새드니스(슬픔)로 설정되어 있는데, 영화에서 이걸 주요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이 설정 자체가 아주 흥미로웠다.


라일리 엄마의 감정 본부와 라일리 아빠의 감정 본부 @Disney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가지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배경에 깔린 감정은 사람마다 다를 거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누구나 날아갈 듯 기쁘거나 뚜껑이 열릴 만큼 화가 나거나 혹은 가슴이 찢어지듯이 슬픈 순간들이 있지만 그 감정들이 사라졌을 때, 즉 영점(표준점)인 상황에서 제일 자연스러운 마음 상태가 가지는 감정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왠지 '인사이드 아웃'의 감정 리더가 그 생각과 일맥 상통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내 머릿속 감정 리더는 분명 새드니스일 거라고 생각한다(남편은 앵거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


연애 초기에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친구가 그런 적이 있다.

- 넌 우울한 사람 같아.


 뜨끔했다. 그런 말을 대면으로 들은 건 처음이었다. 남들이 보는 나는 밝고 명랑한, 항상 웃는 얼굴에 리액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나의 MBTI 유형이 I로 시작한다고 하면 깜짝 놀라곤 했다. 트리플 E인 줄 알았다면서.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남자친구가,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상대가, 나보고 우울한 사람 같다고 하다니.

 그 당시 나는 매일 일기를 쓰고 있었다. 자기 전 음악을 들으면서 일기장 치고는 거금을 주고 산 네이비색의 두꺼운 몰스킨 노트에다 나의 생각을, 그리고 나의 하루를 쏟아내는 것이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스케줄러가 아니라 일기장으로 사용하다 보니 집에만 두고 외부로 챙겨 다니지는 않았었는데 집에 놀러 왔던 남자친구가 그 일기장을 본 모양이었다. 나는 대체적으로는 솔직한 사람이지만 그에 비해 속마음을 쉽게 비치지 않는 성격이라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일기장을 봤다는 생각에 잠깐 화가 났다가, 이상하게도 곧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하지 못하고 삼켜 온 그 말들을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자친구의 그 말속에, 내가 우울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가 두렵다거나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잘못 알았다거나 하는 뉘앙스는 전혀 없었다. 마치 너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말하듯 너는 우울한 사람이구나,라는 문장을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우울 혹은 슬픔이라는 감정을 굉장히 터부시 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울하기 싫은' 사람들이 주로 우울증에 걸리는 것 같다. 너무 우울하기가 싫어서, 혹은 우울한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슬픈 감정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그런데 좀 우울하면 어떤가. 좀 슬프면 어떤가. 그 감정 상태가 일상을 살아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좀 슬프고 우울해도 괜찮다.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지로 막으면 더 그 감정에 파묻힐 뿐이다. 눈물이 날 때 시원하게 소리 내어 울고 나면 마음이 맑아진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슬퍼하면 슬퍼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눈물이 나면 실컷 울라고 한다. 울고 싶은 만큼 울라고, 실컷 슬프고 나야 지나간다고.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울적'한, 혹은 '약간 슬픈' 상태가 편하다. 달리 말하면 고독한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편하다기보다도 그냥 기본적으로 그런 상태인 듯하다. 슬픈 노래만 찾아 듣고, 슬픈 영화를 좋아한다. 딱히 슬픈 일이 있거나 마음 상태가 슬픈 건 아닌데도 그렇다. 그렇다고 무기력하거나 우울에 잠겨있는 것도 아니다. 흥미로운 게 있으면 열정적으로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신나 하기도 하니까.

 신기한 것은 아주 가까운 사람 두어 명 빼고는 아무도 내가 우울한 사람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주변 사람들은 내가 아주 밝고 명랑한 사람인 줄 안다(왜인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확실히 더 밝게 웃거나 더 리액션을 잘해주고, 주변사람들에게 더 웃음을 주려는 약간의 노력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요즘에는 (나이도 좀 더 들었고) 굳이 더 밝아 보이려는 노력 같은 건 한 적이 없었는데도 그렇다. 내가 이걸 깨닫게 된 것은 최근에 회사 팀에서 참여했던 워크숍에서였다. 팀원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색과 단어 등을 쓰는 게임 같은 걸 했는데, 내게서는 '봄날의 노랑', '밝은 주황', '리액션' 등이 반복해서 나왔다. 요즘 회사에서의 나는 울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날 집에 와서 워크숍 얘기를 하고선 다시 남편에게 물었다.

- 나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우울한 사람이야?

남편은 좀 생각하더니 말했다.

- 아니,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야. 다만 진지할 뿐이야.

 진지하다고? 남편은 신기하게도 내가 우울에 젖어있든, 고독에 잠겨있든 개의치 않는 사람이다(그래서 다행이다).


 그날 이후 며칠간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나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혼자 있을 때는 주로 고독과 우울에 젖어 있고, 사회로 나가서는 밝은 모습인 것 같다. 밝은 나도, 우울하고 고독한 나도 모두 나. 남편이 나는 총천연색이랜다. 배경색은 파란색이지만 그 위에 가끔 노랑도 나타나고, 주황도 나타나는 그런 사람.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함께 갈 거라면, 예쁜 파랑으로 가득 채워나가고 이 파랑이 나를 잡아서 녹다운시키지 않도록 잘 관리해 나가는 수밖에. 감정 본부의 새드니스가 더 현명하게 감정을 컨트롤하는 리더가 되도록 훈련시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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