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안(開眼)_어느 봄날, 느리게 걸어요 제주 올레

봄은 봄인가 봐요.

아침저녁으로는 옷깃을 여미는데 낮에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찾으니까요.


이런 날에는 시(詩) 한 편 노래해야죠.

그러면서 여행을 떠나면 더욱 좋고요.

걷기 여행 어떠신지요?

짝사랑하는 연인처럼 쌀쌀맞은 바람을 맞을 땐 빨리 걷다가 내게 미소 짓는 연인처럼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면 느리게 느리게 걷지요.



<開眼(개안) -풍경 3->

최영숙


봄날엔 느리게 걷고 싶다

봄날엔 조금 느리게

지금 여기 이곳부터 시작해서

저기 저-어-기까지

아니 경계선도 긋지 말고

봄날엔 한박자 느리게 느리게 피아니시모

바람에 몸 실어가면서


-어라, 언제 피었나

저기 저 솜털 보송한 애기꽃몽우리

매일 오가던 자리에

안 보이던 것이 보이네.

아린 눈동자


최영숙 <골목 하나를 사이로>, 창비, 1996

시요일 앱에서 퍼왔습니다.



이 시를 읽으니 제주 올레가 생각났어요.

지금으로부터 무려 13년 전, 2008년 어느 봄날이요.


요즘은 제주도 여행할 때, 올레 한 두어 코스는 가볍게 걷는 분들이 많지만 올레가 처음 생겼을 무렵인 2008년은 정말 썰렁했어요. 지금처럼 모든 코스가 이어지지 않고 끊긴 구간이 있었고 (2008년과 지금은 코스 이름도 달라요) 게스트 하우스가 없어서 하루 걷기를 마치면 도시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 밤을 보낸 후 다음날 아침에 버스나 택시를 타고 어제의 도착지로 돌아와 그곳에서 새 출발을 했어요.


1800_IMG_6567.jpg 2008년 4월 말 촬영


2008년이나 지금이나, 봄날엔 느리게 걸어야죠.

암요, 아무럼요.

차를 타고 제주 가시리 유채꽃 길을 씽~ 달리는 것도 좋긴 하지만 이왕이면 걸어야죠.


2008년 당시에는 제주 올레의 화살표는 파란색이었어요. 스페인 산티아고 길의 화살표는 노란색인데 말이죠. 일부러 산티아고 길과 다르게 보이려고 파란색을 택했을 거예요.


제주 올레를 만든 서명숙 님은 스페인 산티아고 길을 걷다가

'내 고향 제주에도 산티아고 길에서 만나는 풍경과 비슷한 장소들이 많은데

뭣하러 비행기 표 값 내가며 스페인까지 와서 길을 걸어야 할까? 제주도에 산티아고 길 같은 길을 만들어 보자'라는 생각을 하셨대요. 그래서 시작한 일이 '제주 올레'였던 것이죠.


1800_IMG_6659.jpg 오른쪽, 청자켓 입은 분이 서명숙 님


대장금 촬영지로 유명한 주상 절리 부근을 걷다가 카페에 들렀는데 우연히 서명숙 이사장님을 만났어요. 그 카페 사장님과 서 이사장님이 친구 관계라 이사장님이 가끔 들린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장님과 몇 말씀 나누었는데, 제주 올레를 확장해 나갈 비전을 갖고 계셨고 제주 올레의 성공을 확신하고 계셨어요. 당시 산티아고 길 여행기로 유명해지셨던 김남희 선생님도 제주 올레를 다녀 가시고서는 극찬을 하셨다면서 강한 자부심을 보이셨습니다. 참 인상적이었죠. 누군가는 그냥 걷기만 했던 길에서 새로운 문화 사업의 아이템을 찾고, 그것을 실행하셨으니까요.


느리게 걸어요~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선 긋지 말고요. 하지만 느리게 해도 될 걸 빨리 하고, 빨리 해야 할 것을 느리게 하지 않기를 기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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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그때 봄날엔 우연히 말 한 마리 만나기도 했어요.

말을 만나면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걸어야 해요. 말이 놀라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요즘 제주에서는 말 보기가 힘든 것 같아서 안타까워요.

그 대신 말 타지 말고 바람을 타고 가시죠. 혹시 누가 아나요? 한 박자 느리게 걸으면 지나가는 바람이 자신의 등에 태워 줄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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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도 하지요. 콘크리트 담벼락에 붙은 소라 껍데기 같은 거 말이지요.

자전거나 자동차 타고 갔다면 생뚱맞은 소라 껍데기는 보이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죠?

이다음에 제주도에 가면, 맨날 보던 성산 일출봉, 산방산, 유채꽃만 보지 말고 황토색 돌멩이랑 초록색 들판도 보고 담벼락에 붙은 소라 껍데기도 찾아보기로 해요. 한 박자, 두 박자 조금 더 천천히 걸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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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걷다 보면 우연히 해녀님들을 만날 수도 있어요.

사진을 찍으려 하면 부끄러워하면서도 아주 자연스러운 모델이 되어 주시죠.

13년 전뿐만이 아니라 요즘도 그러실 것 같아요. 하지만 느리게 사진기를 꺼내 주세요. 빨리 사진기를 꺼내서 후다닥 셔터를 누르면 아린 눈동자는 촬영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요. 어느 봄날에는 더더욱요.



3504_0_IMG_2990.jpg 아주 전형적인 제주 올레 (2009년 하도리에서 촬영)


아참, '제주 올레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올레'의 뜻을 알고 계시는지요?

어느 교수님께서는 '바깥 대문을 포함해 그 안쪽과 바깥쪽 일대를 올레라 칭한다'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일각에서는 제주 방언으로, 집 바깥 대문에서부터 안쪽 현관까지 이어지는 '길'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이러나 저러나 '올레'에는 '길'이라는 의미가 포함돼 있어요. 따라서 '올레 길'이라고 하면 '길'이라는 뜻이 중복된 것이니 '제주 올레'라고 해야 정확한 말이겠습니다.


아무튼, 봄입니다.

그러니까... 봄날엔 느리게 걷기로 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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