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반의 기다림 끝에 영주권을 받았다. 서른 초반 호주로 올 때 갖고 온 거라곤 이제 갓 1년 넘긴 커리어, 그리고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던 아이와 남편이었다.
고용주 서포트 없이 포인트 시스템으로 영주권을 지원하려니 호주에서의 학위는 전무하고, 나이는 이미 서른 중반이 훌쩍 넘어 있었다. 많은 나이와 그렇지 못한 경력은 영주권 신청 가능한 점수들을 한여름 수박썰 듯 숭덩숭덩 깎아먹었다. 사실 몇 년 전 커리어 기간이 훨씬 긴 남편이 주 지원자(main applicant)로 먼저 지원했는데, 1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라 원래 이렇게 느린 건가 싶었다. 알고 보니 남편의 직업군이 부족 직업군에서 없어져버렸다고.
이민법이 왔다 갔다, 부족 직업군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나의 경력도 쌓여갔다. 참기름 짜듯 쥐어짜 낸 경력과 영어점수로 겨우 영주권 신청이 가능한 턱걸이 점수가 맞추어졌다.
최저점이라 혹시 모르니 비자를 도와주는 에이전트에 전화해 진행 비용과 영주권을 받을 가능성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지원을 해볼 수야 있겠지만 결과는 장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 와중에 비용도 적지 않아 고민하다 남편과 함께 결정했다.
이럴 거면 그냥 우리끼리 지원해 보자.
첫 스텝인 EOI(Expression of Interest). '하는 일이 부족직업군에 속하는데, 영주권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지원을 먼저 해야 한다. 일전에 남편이 EOI를 신청하였을 때 한참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던지라 빠른 프로세스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마음을 비우고 제출했다.
운이 좋았던걸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초대를 받게 되었다. '초대'라는 말 보다는 '영주권을 신청할 자격을 받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참고로 여기서는 Invite 받았다고 하는데, EOI를 제출한 사람들 중 이민성에서 한 번에 들여보낼 사람들을 초대해 주면 그제야 서류를 내고, 건강검진을 받는 등의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다. [초대]를 받아야 영주권 신청이 [시작] 되는 셈이다. 그리고 시작부터 영주권이 확정될 때까지 시간은 비자 종류마다, 그리고 케이스마다 천차만별이다.
EOI 작성하기 전 미리 준비해 둔 서류들도 있었지만, 초대를 받으면 준비해야지 했던 서류들도 한꺼번에 준비하려니 정신이 없었다. 남편과 아이 둘까지 줄줄이 소시지처럼 따라오는 것이었으므로, 지원 비용도 비용이지만 준비해야 할 서류만 70가지가 넘었다. 결혼 증명서, 아이들 출생증명서는 기본이고 한국 가족 증명서부터 지난 고용주에게서 받은 업무 확인서까지,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았다.
이미 떠나온 지 5년이 지난 뉴질랜드에서 일했던 회사 상사에게 연락을 따로 해야 했고, 호주에 와서도 두 번 이직을 했으니 두 회사의 상사들에게 따로 연락을 해야 했다. '잘 지내셨어요' 그동안 연락 한 번 없다가 이제 와서, 그것도 용건이 있어 이메일, 문자 등으로 말문을 트고 서류에 사인을 받아야 하는 일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곤혹스러웠다.
그것뿐인가. 기억에서 사라진 지난 10년간 지냈던 곳의 주소와, 일했던 회사들의 주소를 써야 했다. 지긋지긋한 서류들. 지난 이메일들이나 예전에 비자 신청할 때 썼던 지원서 등을 뒤적여가며 지난 10년의 거취를 찾아내 소상히 적어냈다.
다만 서류를 준비하다 놀란 건, 어느덧 지난 10년이라는 시간 속에 더 이상 한국에서의 시간은 없다는 것. 뉴질랜드에서 여기저기 전전하던 셰어하우스 주소와, 남편을 만나 살던 곳, 그리고 호주에서도 두어 번 이사했던 주소들로, 이미 주소란은 빼곡했다.
지난하게 떠돌며 방황했던 삶의 흔적이, 영주권 신청양식에 고스란히 담겼다.
회사에서 업무 중 이메일로 알게 된 영주권 소식. 퇴근길 남편과 통화하며 파티를 해야겠어! 하고 거창한 음식이 한껏 올라온 저녁상을 이리저리 그려보았다.
마구잡이로 떠오르던 음식들과, 차려야 한다는 귀찮음이 앞서 외식이라는 옵션은 참 빨리도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일이라는 점. 그리고 따로 당기는 음식이 있어 손수 저녁을 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나는 하얀 쌀밥을 짓고, 그 쌀을 씻은 쌀뜨물에 양파와 애호박, 두부 한 모가 들어간 된장찌개를 끓였다. 부추와 함께 그날따라 냉장고에 많던 애호박을 듬뿍 넣은 부침개는 별미로 추가하고 말이다.
한국에서는 장기간 살아본 적 없는 남편과 아이들이지만 익숙한 듯 맛있게 먹어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된장찌개 한 스푼에 자주 불안했고, 유약했던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몇년에 한 번씩 가는 한국이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우버보다 카카오택시가 더 활성화된 곳, 구글맵으로는 검색이 잘 되지 않는 곳. 처음 보는 맛집과 유행하는 음식들이 생경해지는 순간들, 익숙했던 번잡한 신도림역에서 환승 라인을 따라 두리번거리던 순간들.
오랜 시간 한국을 떠나와 살면서, 언제부턴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못한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모래알 같은 순간들 속에서도, 간혹 아주 중요한 순간, 작고 땡땡한 짱돌 같은 것이 [너는 한국인이야]라고 말하며 튀어나오기도 한다.
이제야 이곳에서 삶의 거취가 안전하다는 확인증을 받고, 오래 묶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이 된장찌개였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