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월 Jul 04. 2023

지난 주말, ‘아빠 집’에 다녀왔다

이곳은 공장인가 농장인가

깝치지 말고 잠이나 자


꾸벅꾸벅 졸아가며 시험공부를 하던 고등학생 딸에게 아빠는 말했다. 공부해 봤자 부품이 될 뿐이라고. 중견기업의 부품이었던 엄마는 아빠가 엄마와 마찬가지로 같은 회사의 부품이었던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데(월급을 꼬박꼬박 가지고 올 것이니) 엄마가 나를 낳고 그만두자(그땐 그랬다) 아빠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여 황당했다고 한다. 부품이길 포기한 아빠는 63세(만으로 해야 하나? 만으로는 62세이다)에도 밤을 새워가며 일한다. 돈은 이전보다 많이 번다고 하시는데 다행이면서도 걱정이 더 크다.




아빠는 8남매 중 셋째이자 큰 아들이다. 아빠 위로 아들이 둘 더 있었다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에게는 그러지 말라고 이름이 둘이고 무슨 어머니라면서 동네 어른을 엄마처럼 해두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빠는 살았다면 형들이었을 그 아이들이 죽은 시기를 넘기고 나도 낳았다.


어렸을 때 가난해 떨어진 강냉이 뻥튀기를 주워 먹었다고 한다. 도시락도 제대로 챙겨가기 힘들었다고. 달리기를 무척이나 잘했지만 운동을 하려거든 돈이 필요했는데 그만한 돈이 없어 꿈도 포기했다고 한다. 운동을 접고 군에 갔다가 특채로 경찰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운이 없어 특채날 병원에 실려갔다고 했다. 그렇게 부품의 길을 갔다고. 그런데 그렇게만 살 순 없어서 아빠만의 기술을 길러 사업가가 되었다.


그 덕에 어린 시절부터 아빠 공장에 가 놀았던 기억이 있다. 여름이면 포도 넝쿨에 주렁주렁 포도가 열려있었던 그곳. 주말에 가면 아빠가 시켜 주는 짜장면이 별미였다. 추운 겨울엔 털이 달린 레자 무스탕을 난로에 데워서 입혀주었다. 참 따뜻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는 법. 동업자의 배신으로 모든 걸 날려먹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살던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갔다. 엄마아빠가 28, 31에 마련했던 첫 집이었다. 10년을 살았던 그곳, 내 인생의 첫 기억이 있는 곳, 동생이 태어난 곳이었다. 방 세 칸의 그 아파트에서 쫓겨난 우리는 옆 동네 다세대주택 반지하에 자리를 잡았다. 내 방은 사라지고 이불 하나 겨우 깔 수 있는 방을 동생과 함께 쓰며 부단히도 싸웠다.


엄마에겐 학교가 더 가까워져 좋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사실은 피아노도, 에어컨도 놓을 수 없었던 그 집, 안방 창에서 주인집 마당 바닥이 보이던 그 집에 들어설 때면 정문이 아니라 쪽문으로 들어가는 나를 누가 볼세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친구를 초대해 놀곤 했는데 그중 한 친구네 집에 갔던 날, 그 친구 집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처럼 공교롭게도 경매에 넘어간 ‘우리 집’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 하고 엉엉 울었더랬다.


이후 반지하집을 나와 다시 아파트로 이사 갈 때까지 만 3년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아니 말하지 못하고 무조건 잘 살아내야겠다며 할 수 있는 일-공부-을 열심히 하다가 이사를 마치고서야 부모님께 말했다. 나 그 집에 갔었다고, 거기 내 친구가 살았다고. 그래서 나 더 열심히 살았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더 잘 살 거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기까지 아빠는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한 날은 공부하는데 자꾸 잠이 와서 아빠는 어떻게 그렇게 잠을 안 자고 일을 하냐 물었다. 아빠는 “이 새끼야, 너네 엄마랑 너네를 먹여 살려야 하는데 잠이 오냐”하셨다. 그 무게를 이제야 어렴풋이 짐작해 본다.




그런 아빠가 3년 전, 말해오던 목표 중 하나를 이뤘다.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나를 도와주기 위해, 아니면 아빠가 너무 사랑하는 당신의 유일했던(지금은 둘이 되어버렸지만) 손녀를 돌보기 위해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왔다. 반지하에 살던 30대의 그는 아침 등교준비 시간에 화장실 순서나 사용시간으로 싸우던 우리 자매에게 “아빠 40대엔 화장실 두 개인 집으로 이사 간다.”하였으나 그 말은 반지하를 탈출해 아파트로 이사 갔을 때도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아빠 50대엔 갈게 “로 바뀌었다. 그리고는 다시 등장하지 않다가 60이 되고서야, 만 59세에 우리 집 근처로 오며 이뤘다(엄마는 운 좋게 결혼과 동시에 화장실 2개인 집에 살았던 나에게 본인이 좋은 집에 살게 되어 좋다면서도 우리가 어렸을 때 이런 집에 살게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2년 전, 드디어 더 이상 세를 내지 않는(빚은 있으나 빚도 자산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아빠의 땅에 아빠의 공장을 지었다. 코로나로 인해 확장이전 개업식을 하진 못했지만 작게 고사를 지내기로 하여 기념수건을 맞춰 보내드렸다. 2층에 있는 사무실은 더 이상 컨테이너 박스가 아니다. 위험한 철제 계단을 통해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탕비실을 가장한 부엌은 엄마집보다도 더 넓다. 그곳을 우리 집 첫째는 자신의 놀이터 또는 ‘할아버지 집’이라고 부른다. 인터넷 티비와 냉난방 시스템을 갖춘 아빠의 방이 있기 때문에 아빠가 집에 잘 안 들어오시고 거기서 주무시며 살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엄마집과 우리 집은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곳이지만 이러한 연유로 지난 6월에 있었던 아빠 생신엔 아빠집에 다녀왔다. 둘째가 태어난 이후 첫 방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주말, 또 초대받았다. 이유는, 아빠가 공장 테두리를 따라 각종 채소를 심어놓았았는데 그것들이 무르익었기 때문이었다. “할비 공장에 와. 감자도 캐고 가지랑 고추도 따 가.” 주중에 비가 계속 오더니 토요일에 마침 쨍하게 해가 났다. 아이와 샌드위치를 만들려던 참이었기에 얼른 만들어 들고 갔다.


도착하자마자 만들어간 샌드위치를 건네고 엄마가 해준 고추장 불고기를 밭(?)에서 딴 여리고 야들야들한 상추를 겹겹이 싸 와구와구 먹었다. 사무실 바닥에 돗자리를 넓게 펴고 놀다가 해가 좀 넘어갈 쯤에 호미, 가위, 비닐백을 챙겨 밭으로 갔다. 감자 싹을 쑤욱 뽑아내고 흙을 호미로 슬슬 긁어내니 뽀얀 감자가 여기저기서 얼굴을 내밀었다. 다 나왔다 싶다가도 호미질을 몇 번 더 하니 또 나오고 또 나오는 감자를 보는 아이의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다. 유치원 때 해본 체험과는 달리 선생님이 하지도 않고 자기 혼자 다 하니 너무 좋다고 했다. 한 평도 안 되는 땅에서 감자가 비닐팩 한가득 나오자 아빠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년엔 다른 땅에도 감자만 심어야겠다 하시며, “아 감자 진짜 많이 나오네~ 생각보다 많이 나왔네~”를 반복하여 말씀하셨다. 가지와 고추도 가위로 자르고, 대파도 한 뿌리 뽑았더니 장본 것처럼 묵직해졌다.


 


한가득 채소를 챙겨 집으로 돌아가려던 차에, 차가 더럽다며 공장 마당에서 세차를 해주신다. 아기를 업고 있는 통에 돕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 뭐든 해보려고 하는 첫째가 세차를 돕는다. 호스를 들고 물을 뿌리며 즐거워한다. ’ 할아버지 집‘은 정말로 네 놀이터구나.





첫째를 낳던 때 아들이 아니라고 뭐라고 하더니 기분 좋아 여기저기 자랑했던 그는 내가 둘째를 낳으러 가기로 한 날의 전날에도, 가던 아침에도 문자를 줬다. 전화는 전화만 되면 된다고 하던 사람이 이틀 연속 먼저 연락을 했다. 말로는 둘째가 할아버지~하고 부를 때나 오라고 그러면서 이런저런 핑계로 자기 집에 초대하는 아빠.


자연인이 꿈이라며 티비로 자연인만 보며 꿈의 공장에서 작은 농장을 꾸리는 그에게 쓸데없이 전화 한 통 해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울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