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아포칼립스 (Apocalypse)

[증언의 세대] 모든 것이 끝났다

by 아반


황폐 (荒廢)


폐쇄된 31번 구역은 모든 것이 평온했다.

더스틴과 아내는 무언가에 의해 면역이 형성된 것처럼 코로나 파이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코로나가 발생하던 시기에 걸렸던 계절성 독감이 면역력을 가져다준 것인지

아니면 코로나에 이미 걸린 후에 회복된 것인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반면에 폐쇄 구역 바깥의 사람들은 코로나 파이의 위력에 하나둘씩 쓰러져 가고 있었다.

방역은 이미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이며 바이러스가 안 퍼진 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길을 가다 옆에 있는 사람이 쓰러져도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다.

거리는 미국 개척시대 황량한 서부 지역처럼 모래 바람이 불고 그나마 보이던 사람들도 무언가에 쫓기듯 어디론가 사라졌다.




- 1년 후 -


어느 허름한 시골 마을

마을 회관으로 보이는 건물에 두서너 명의 사람들이 모여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보급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그 앞에 노인 두 명이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고 나이 든 노파 한 명이 의자에 앉아 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야 씨, 이게 다야?"

보급원으로 보이는 남자와 말씨름을 벌이던 노인 한 명이 보급품을 나눠주는 그 남자에게 쌍욕을 하더니

보급품으로 받은 흙 묻은 감자 꾸러미를 남자의 면상에 집어던졌다.


감자를 얼굴에 맞은 그 남자는 조용히 뒤돌아 보급품 창고에 들어가더니

잠시 후 검은 봉지 꾸러미와 녹슨 삽 한 자루를 들고 나온다.


그리고 그 꾸러미를 노인에게 건네준다.

바닥에 쏟아진 감자도 주워서 꾸러미에 다시 담아 그에게 내어 준다.


노인은 꾸러미를 확인하더니 좀 화가 누그러진 모양이다.

"진작에 그럴 일이지. 어디를 속여 먹으려고..."


그 노인은 아무 말없이 뒤돌아서서 돌아 가려한다.

그때 보급원으로 보이던 남자가 삽자루를 두 손으로 움켜쥐더니 돌아서서 나가려는 노인의 뒤통수를 내려쳤다.


그러더니 그는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삽자루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야아아~ 악!!!"

괴성을 지르며 마구 휘둘러 대는 그 삽자루에 의자에 앉아 있던 노파가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안돼 오지 마! 사람 살려!"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노인이 다리를 맞고 절뚝거리며 마을 회관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절뚝거리며 도망가는 그 노인을 보급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뒤쫓아 간다.


뒤를 돌아보면서 절뚝거리며 도망가는 노인은 얼마 못 가서 철퍼덕 넘어졌다.

성큼성큼 뒤쫓아 가던 그 보급원 남자는 삽자루를 들어 때릴 듯이 위협을 했다.


"안돼 살려줘"

넘어진 노인은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보급원 남자는 넘어진 노인의 다리를 한 손으로 잡더니 노인을 질질 끌고 다시 마을 회관으로 데리고 간다.


"하지마 하지마"

끌려가는 노인은 발버둥 치지만 일어설 수가 없다.


보급원 남자가 그를 마을 회관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

마을회관 문이 닫히고 잠시 후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퍽"


비명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마을 회관

비릿한 피 냄새가 가시지 않은 마을 회관에 고기 굽는 냄새가 피 냄새와 뒤섞인다.

그 남자가 스팸 캔을 따서 프라이팬에 굽기 시작했다.

그리고 16년 산 위스키 한 병을 거칠게 따더니 병째 들어부어 마셨다.

구운 스팸을 안주삼아 허겁지겁 먹고 난 남자는 이내 깊게 곯아떨어져 버렸다.


마을 회관, 핏자국이 묻은 소파에 대자로 뻗어 버린 남자

"드러렁... 컥, 푸하..."

그가 코를 골 때마다 빈 마을회관이 쩌렁쩌렁 울린다.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가 이 마을에 남은 유일한 사람이다.


다음날 정오 무렵

마을 회관 포치,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

죽었는지 살았는지 흔들의자가 건들건들 앞뒤로 흔들린다.


남자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권총을 만지작 거린다.

탄창을 꺼내 총알을 확인하던 남자는 탄창을 다시 장착하고 허공을 향해 총을 쏘는 시늉을 한다.

"탕 탕 탕"

입으로 총소리를 내더니 총신을 "후" 하고 불어 본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더니

총구를 입에 물고 흐느낀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희한한 소리를 낸다.


"흑흑 흐하하아"


"탕!"


벼락이 치는 듯한 총성이 울리더니 남자의 머리가 고꾸라진다.

흔들의자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남자가 앞으로 푹 쓰러져 버렸다.

빈 흔들의자가 다시 흔들리더니 조금씩 흔들림이 줄어들다가

멈췄다.


옆으로 쓰러진 남자

덥수룩한 수염과 장발로 가려진 그의 얼굴에 햇빛이 비친다.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를 쓸어 올린다.


그는 다름 아닌 교회 목사이자 국민통합 위원장이던 진 해크먼이었다.


바람이 불더니 흙먼지가 일기 시작한다.

뿌연 흙먼지가 눈앞을 가리다가 이내 사라져 버렸다.

멀리서 보면 너무나도 평화로운 마을에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응애, 응애, 응애"


아기의 울음소리가 우렁차다.

더스틴의 아내가 만삭이 되어 배가 불러오더니 드디어 건강한 사내 아기를 출산했다.

아기는 아주 건강하고 우량했다.


더스틴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엄마의 품 속에 안겨 주었다.

아기에게 젖을 물리자 아기는 힘차게 젖을 빨아먹더니 새근새근 젖꼭지를 문 채로 평온하게 잠이 들어 버린다.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더스틴의 아내는 아이의 얼굴에서 빛이 비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둠의 세대가 지나가고 미래의 세대에서 비치는 광채 같았다.

하얗고 뽀얀 아이의 투명한 피부에서는 실제로 서광(曙光)이 비치는 듯했다.


더스틴과 아내는 아이의 이름을 시드(Seed)라고 지었다.


여자의 씨

시드가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