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의 세대] 모든 것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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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번 폐쇄 구역은 완전히 봉쇄되었으며 외부에서 보이는 그 지역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공포의 공간이었다. 코로나 파이(π)로 인해 그 지역 사람들이 모두 몰살되었다는 흉흉한 소문만 사실인 듯 루머인 듯 떠돌아다녔다.
하지만 사람의 발길이 끊긴 철책 뒤의 31번 구역은 생명이 움트는 회복과 치유의 공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오히려 폐쇄된 구역 바깥의 세상은 점점 무법천지로 변해 가고 있었다.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은 거대한 케이오스(Chaos) 속에서 헤매고 있다.
살상과 폭력이 난무하고 약탈과 범죄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선과 악이 무엇인지의 경계는 이미 의미를 잃어버렸다.
빼앗지 않으면 빼앗기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었다.
정부가 무엇을 하는지 아니 정부가 아직도 존재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힘이 있는 자가 법이고 권력이 되었다.
세상은 온통 힘에 의해 최소한의 질서가 유지되는 정글의 법칙이 적용되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코로나 파이(π)는 이미 모든 곳으로 퍼져 더 이상의 봉쇄니 격리니 하는 말들은 사실상 무색해졌다.
31번 폐쇄 구역 바깥의 세상은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곳, 살아 있지만 죽음을 기다리는 생지옥(生地獄)이 되어 가고 있었다.
도주하던 로버트가 차에서 내려주고 떠난 후 남겨진 더스틴과 아내는 손을 잡고 산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함께 걷고 있다.
이미 정부의 폐쇄 조치가 이루어진 31번 구역에는 사람의 모습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상쾌한 바람이 수풀 나무 사이에서 이따금씩 불어와 더스틴의 이마를 스친다.
산길을 따라 얼마 가지 않아 산 중턱에 넓게 트인 공간이 나오고 기상 관측소로 쓰이던 건물이 나왔다.
산길 옆으로 이어지는 작은 개울 옆에는 로버트의 말대로 비상급수시설로 보이는 물탱크 시설이 있었다.
산중턱 아래 고지대 마을에 수도를 공급하는 시설로 보였다.
기상관측소 건물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규모의 건물이었다.
주 생활공간과 작업 공간이 잘 분리되어 있었고 보급품을 저장하는 커다란 창고 건물이 붙어 있었다.
구역이 폐쇄되어 직원들이 급하게 떠나는 바람에 보급품들이 그대로 창고에 쌓여 있었다.
"여기 봐요. 쌀, 감자, 옥수수도 있어요."
웃음을 되찾은 더스틴의 아내가 남편에게 큰 소리로 알려준다.
창고에는 통조림, 부식 박스와 라면 박스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소주병과 맥주병이 박스채로 뜯지 않고 쌓여 있다.
숙소는 성인 남자 서너 명이 충분히 함께 거할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이었다.
더스틴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기상관측소 정문을 닫고 빗장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죽은 나무와 창고에 있던 철책으로 주위를 둘러 기상대 입구를 막아 버렸다.
창고에는 LPG가스통이 여러 개가 있었다.
비상용 발전기와 여분의 연료도 충분했다.
더스틴과 아내는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으로 저녁을 차릴 수 있었다.
통조림으로 찌개를 끓이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지은 쌀밥을 김과 김치와 함께 먹을 수 있었다.
다음 날, 기상대의 아침은 청명한 햇살이 비추고 새들이 지저귀는 아름다운 낙원 같았다.
일찍 일어난 더스틴은 남아있는 식량의 양을 가늠해 보고 기상대 창고에 있는 장비들을 점검해 보았다.
기계톱과 농기계들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내부를 모두 둘러본 더스틴은 기상대 주변에 있는 작은 텃밭도 돌아보았다.
그리 작지도 않은 텃밭에는 채소와 과일, 옥수수가 골고루 종류별로 심겨 있었다.
작은 토마토가 줄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빨갛게 영글어가고 있었다.
더스틴은 아내와 함께 기상대 뒷길로 이어지는 산길을 산책하듯 걸었다.
길 옆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다채롭게 이어져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어우러져 작은 실내악 연주를 듣는 것 같았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인류 최초의 정원에서 쫓겨났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인류는 그들이 잃어버린 실낙원(失樂園)을 꿈꾸며 살아왔다.
이제 인간이 폐쇄해 버린 31번 구역은 어느새 더스틴 부부만의 낙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