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이야기 21
오십 대 기사들 사이에서 이십 대 말의 니콜라스는 솜털내기였다. 갑작스레 주름도 없는 청년이 들어와 이야기도 잘 듣고 농담도 잘하니 사랑받을 수밖에. 한 술 더 떠 동네 맛있는 빵집에서 매일 아침 동료들 몫까지 크루아상을 사들고 갔다. 그저 일을 한다는 사실이 기뻤고 처음으로 좋은 직장을 가졌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스무 살 적 바에서 일했을 때처럼 마음을 다해 일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고객들은 흥미로운 주제들을 던졌다. 단시간에 다양한 국적의 사람을 만나다 보니 국제적 사건이 일어났을 때, 예를 들어 트럼프가 국경 장벽을 세우거나 페이스북이 개인 정보를 수집하고, 종신 주석이 되고픈 시진핑이 헌법을 개정할 때, 나라마다 사람마다 다양한 ‘관점’을 듣게 되었다. 니콜라스는 이런 시간들이 좋았다.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식견이 넓어지 기분이었다. 물론 힘들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대쪽 같은 동료 기사들의 성격에도, 막장 같은 졸부들의 기행에도 웬만해선 상처 받지 않았다. 일에 관련된 얘기는 편을 들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의전 기사로 일하며 번 돈은 생각 이상이었다. 엄마 리디아 집의 세탁기와 냉장고, 침대를 바꾸었다. 받은 팁도 그녀에게 다 주었다. 어쨌거나 그 나이 먹도록 엄마 집에 얹혀살았던 전적이 있으니 다 갚고 싶었다. 그동안 도움을 준 친구들에게도 아끼지 않았다. 시즌이 마칠 무렵 사장은 니콜라스에게 마르세유 지점의 지점장으로 가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니콜라스는 거절했다. 대신 호주로 떠나겠다고 말했다. 영어를 조금 더 하면서 경험도 넓히고 싶다고. 이미 발견하는 기쁨을 알아버린 그였다. 안주하지 않겠어. 두 달 후, 그는 프랑스에서 24시간을 날아 남태평양의 거대한 섬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호스텔에 묵었다. 하루는 호스텔 룸메이트가 그에게 전단지를 건넸다. ‘공짜 영어 수업(Free English Class).’ 평생 공부와 담을 쌓고 살던 그가 이상하게도 가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학원에서 그는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한국 여자 한 명을 만났다. 문법을 꼼꼼히 따지는 그녀와 나오는 대로 말하고 보는 니콜라스는 생김새도 생각도 살아온 인생도 달랐다.
일 년 전 런던에서 코끝 시린 신년을 맞았던 그는 그해 한여름의 신년을 맞았다. 셔츠를 차려입고 남자 둘이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불꽃놀이를 봤다. 그는 용기를 내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도 불꽃놀이를 보고 있냐고. 그날 밀려오는 인파를 헤치고 만난 둘은 항구에 앉아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바다 옆의 오래된 벽돌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에게 모터바이크를 소개해주었고 그녀는 그를 오케스트라 공연에 데려갔다.
변변찮게 일도 못하고 모아놓은 돈마저 다 쓰고 돌아온, 누가 보면 실패라고 할 만한 호주 생활이었지만 대신 그는 새로운 가족을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사람을 만나려고 내 인생이 여기까지 온 걸지도 몰라. 시드니에 겨울이 찾아오자 둘은 동남아시아로 떠났고 한국을 여행했다. 그들은 함께 모험했다. 발리의 논두렁에서, 태국의 산속에서 니콜라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놓았다. 그럴 때면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다가 울었다. 때론 미안하다고도 했다. 그녀는 비로소 그의 행동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왜 혼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지, 왜 게임을 좋아하면서도 시간을 쏟지 않는지, 왜 힘든 일이 생기면 정면으로 맞서려고 하는지, 왜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지, 왜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지, 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관대한지, 왜 언제나 웃으려고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2019년 가을 프랑스로 날아왔다. 11월 12일 그와 결혼을 이야기하던 날, 그녀는 그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해 여름 필리핀 폭우 속에서 함께 모터바이크를 탈 때 불현듯 그런 강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해야만 할 것 같은 일이라고. 당신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다시 가을이 찾아들 무렵 그녀는 니콜라스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